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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제22화: 차가운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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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지워주겠다.
그 단어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자하르의 고막을 찢고 들어가 뇌수를 헤집는 쇠못처럼 박혔다. 시간의 흐름이 멈췄다. 붉게 타오르는 장막의 빛, 동료들의 경악 어린 숨소리, 제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둔탁한 소음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느리게 재생되는 필름처럼 느껴졌다.

구원이라고?
이것이?
루아의 존재를, 그녀의 웃음과 눈물, 온기와 기억, 그 모든 것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닥쳐."

목구멍에서부터 끓어오른 것은 분노를 넘어선, 순수한 살의였다. 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것과 같았다.

"네놈이 감히... 네놈 따위가 감히, 그녀를 입에 올려?"

그는 바닥에 나뒹굴던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찢겨 피가 흐르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저 오만한 장막 너머의 존재를 향한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흥미롭군. 필멸자의 감정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드니.』

백색의 마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티끌만 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곤충학자가 새로운 표본을 관찰하는 듯한, 지독히도 냉정한 지성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네년이 모를 리 없어!"

자하르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방법은 없다. 그릇은 이미 금이 갔고, 내용물은 끊임없이 그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고 있다. 너희가 지금껏 지연시킨 시간만큼, 봉인은 더욱 불완전해졌을 뿐. 네가 지금 느끼는 그 격렬한 감정조차, 저 그릇 안의 공허에게는 최고의 자양분이 되고 있지.』

마녀의 말은 잔인한 진실이었다. 그가 루아를 위해 분노하고 절망할수록, 그 감정의 파동이 역으로 그녀 안의 공허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저주를 품었듯, 이제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끔찍한 아이러니였다.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이성을 후려쳤다.

"현실을 보시란 말입니다, 전하."

카엘이었다. 그는 어느새 검게 그을린 손을 치료한 발레리우스를 부축해 일으키며, 자하르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투구 아래 눈빛은 불길할 정도로 침착했다.

"저 여인은... 이미 이전의 그 인간 계집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보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네놈마저 그따위 소리를!"

"망자의 골짜기에서, 그리고 어젯밤 동굴에서. 그녀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작 속삭임에 불과할지 모르나, 머지않아 그 속삭임은 주인의 목소리를 집어삼킬 겁니다. 저 마녀의 말이 맞습니다. 이것은 구원입니다. 그녀가 완전히 괴물이 되기 전에,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란 말입니다!"

"닥쳐! 닥치라고!"

자하르는 이성을 잃고 카엘에게 달려들었다. 마력이 바닥난 몸이었지만, 증오가 실린 주먹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카엘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날아오는 주먹을 손쉽게 잡아챘다. 용족 수호자의 악력은 쇠사슬과도 같았다.

"놓아!"

"언제까지 그렇게 외면만 하실 겁니까! 저 계집 하나의 목숨과, 이 세상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왕족으로서, 용족의 마지막 후계자로서, 어떤 선택이 더 현명한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녀는 '계집 하나'가 아니야! 내 세상의 전부다, 이 망할 자식아!"

두 사람의 격렬한 대립 사이로, 발레리우스의 지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만하게, 두 사람 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닐세."

그는 자하르와 카엘을 떼어놓으며, 붉게 타오르는 장막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백색의 마녀시여.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다른 방법은 정녕 없는 것입니까? 태초의 계약에 대해, 엘라라의 눈물에 대해, 그 어떤 실마리라도 좋으니..."

『너희 용족은 변하지 않는군. 천 년 전에도, 그 이전에도,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탐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려 발버둥 치지.』

마녀의 목소리가 장막과 함께 희미하게 흔들렸다. 거대한 눈의 형상이 천천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저 걷는 재앙을 끌고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 모두 함께 공멸의 길을 걷든. 혹은 내게 넘겨, 희생을 통해 더 큰 비극을 막든. 나는 기다리겠다. 허나, 내 인내심이 그릇의 균열보다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장막을 뒤덮었던 붉은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눈의 형상도, 정신을 뒤흔들던 목소리도 온데간데없었다. 원래의 푸르고 은은한 빛으로 돌아온 장막은, 마치 방금 전의 모든 일이 환상이었다는 듯 고요하게 물결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환상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들의 뇌리에, 영혼에,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새겨진 마녀의 마지막 선고 때문이었다.

***

동굴로 돌아온 일행 사이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흘렀다. 모닥불은 거의 사그라들어, 붉은 잿더미만이 희미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무도 불씨를 살리려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희망처럼, 모든 것이 꺼져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루아는 동굴 가장 깊은 곳, 어둠에 몸을 기댄 채 무릎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는 장막 앞에서 벌어진 모든 대화를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주겠다는, 그 끔찍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도, 슬픔도, 분노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자하르는 그런 그녀에게 차마 다가가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서성였다.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갈래의 생각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른 방법, 다른 방법. 어떻게든 찾아야만 한다. 리안을 찾아 죽여버리면? 아니, 그는 근원이 아니다. 이졸데에게 돌아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발레리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꺼이 루아의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결국 모든 길은 막혀 있었다.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카엘이 침묵을 먼저 깼다. 그는 망가진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전사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말했다.

"해가 뜨면, 저는 왕자 전하를 모시고 용족의 땅으로 귀환하겠습니다. 저 여인은... 마녀의 뜻에 맡기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네가... 감히..."

자하르의 목소리가 살얼음판처럼 갈라졌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충언입니다."

카엘은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는 왕자 전하의 수호자입니다. 전하의 안위와 용족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제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악역이 될 것입니다. 설령 그 끝에 전하의 증오를 받게 된다 해도 말입니다."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지독하게 올곧고, 그래서 더 잔인한 신념이었다.

"자네의 충심은 알겠네만, 너무 성급한 판단일세."

발레리우스가 그를 제지했다.

"저 아가씨는... 아직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어. 그리고 왕자 전하께서는 결코 저 아가씨를 포기하지 않으실 걸세. 우리가 여기서 분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뿐이야."

"그럼 늙은 용께서는 뾰족한 수라도 있으십니까? 언제까지 이 희망 없는 여정을 계속하며 시간을 낭비하실 겁니까? 저 여인의 심장에서 뛰는 검은 맥박이, 우리 모두의 목을 조르는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카엘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저 계집의 숨통을 끊어서라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굴 안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루아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 남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웠지만, 눈빛만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제가... 사라지는 게 맞아요."

"루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하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의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저 마녀의 말에 현혹된 거야, 그렇지?"

"아니요, 왕자님. 지금만큼 제정신이었던 적도 없어요."

루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나도 서글퍼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들려요. 제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이건... 제가 아니에요. 이건 굶주려 있어요. 모든 따뜻한 것들을 원해요. 왕자님의 슬픔도, 저분들의 분노도, 전부 다 너무나... 맛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하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게 더 커지기 전에... 저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끝나야 해요. 저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왕자님을 해치는 존재가 되기는 더더욱 싫어요. 그러니까... 저 사람 말이 맞아요. 이게... 저를 위한 마지막 자비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자하르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눈물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녀 안에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가, 자하르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끊어버렸다.

***

그날 밤, 모두가 지쳐 잠든 깊은 새벽.

자하르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곤히 잠든 루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차가운 이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작별 인사였다.

그는 동굴을 빠져나왔다. 카엘은 입구에서 보초를 서다 잠시 졸고 있었고, 발레리우스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백색의 마녀가 있는 장막을 향해 걸어갔다. 푸르고 은은한 빛을 내뿜는 장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장막 앞에 멈춰 서서, 허공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듣고 있다는 걸 안다."

주변은 고요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녀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음을 확신했다.

"거래를 하자."

그의 목소리는 강물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네가 말했지. 공허는 그릇을 원한다고. 그 그릇이 금이 갔다고."

그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그렇다면... 더 튼튼하고, 더 크고, 더 완벽한 그릇을 주는 건 어떤가?"

잠시 후, 그의 정신 속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전처럼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었다.

『...무슨 뜻이지?』

"내 안에는 용의 피가 흐른다. 천 년을 이어온 왕가의 마력이 잠들어 있지. 인간의 영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다."

자하르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그녀에게서 공허를 꺼내. 그리고... 내게 넣어라. 내가 새로운 그릇이 되어주지.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려준다면, 내 영혼을 기꺼이 네놈의 실험체로 바치겠다. 어떤가. 이만한 거래는 다시없을 텐데."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니,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스스로가 가장 혐오하던 괴물이 되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마녀는 그의 제안을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재미있군. 정녕 후회하지 않겠나? 너는 너 자신을 잃고, 영원히 굶주리는 허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사랑했던 여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이름 없는 재앙이 될 텐데.』

"상관없다."

자하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동굴에 잠들어 있는 루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다시 웃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다시 따뜻한 햇살 아래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가... 살아만 준다면."

장막이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안으로 초대하려는 듯이, 장막의 한가운데에 작은 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