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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소는 루아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루아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거세된 채, 오직 텅 빈 호기심과 살아있는 무언가를 향한 기묘한 갈증만이 담긴 미소. 자하르는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쏠리며 얼어붙는 감각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굴 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소리,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의 소리가 갑자기 먼 세상의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더.
소리 없는 입 모양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텅 빈 시선은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남은 마지막 온기마저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싶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공허. 그녀 안에 갇힌 그것이, 그녀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발레리우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악몽의 장막을 찢었다. 그 소리에, 루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을 지배하던 섬뜩한 이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피곤과 혼란으로 가득 찬 본래의 갈색 눈동자가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가 왜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웅크렸다. 자하르는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다가갔다.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군.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녀가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던 망토를 여며주며,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손끝에 닿은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추워서 깬 것 같아요."
루아는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의 기이한 미소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자하르는 안도하는 동시에, 더 깊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을 담보로 한 끔찍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쉬게.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어."
그는 최대한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를 다시 눕혔다. 그리고 자신은 모닥불 앞에 망부석처럼 앉아,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잠들 수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 눈을 감은 사이, 그녀 안의 그것이 다시 깨어나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발레리우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하르가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진실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위태롭게 쌓아 올린 탑에서 주춧돌 하나를 빼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
다음 날의 여정은 지독한 침묵 속에서 계속되었다.
밤사이 루아의 상태는 더 나빠진 듯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불안정했고, 입술은 옅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춥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자하르는 그런 그녀를 거의 부축하다시피 하며 걸었다. 그의 신경은 칼날처럼 곤두서서,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멍하니 앞만 보고 걸었지만, 아주 가끔, 그녀의 시선이 살아있는 무언가에 닿을 때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공허한 빛을 그는 몇 번이고 목격했다. 날아가는 새, 바위틈에 핀 작은 들꽃, 심지어는 그들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까지. 마치 세상의 모든 생명이 지닌 온기를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고, 또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지요, 전하."
어느 순간, 그들의 옆으로 다가온 카엘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전하의 그 불안한 기운이 저 계집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자하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카엘의 목을 물어뜯을 듯 흉흉했다.
"저는 전하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판단할 뿐이지요."
카엘은 그의 살기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저 여인은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그저 저주에 고통받는 피해자였다면, 지금은... 저주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갓 태어난 포식자가 주변을 탐색하듯이 말입니다."
그의 말은 정확하게 자하르의 공포를 꿰뚫는 비수였다. 자하르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 여인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저 여인과 함께 저주의 일부가 되어 파멸할 것인지. 전하의 그 어설픈 동정심이,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기 전에 말입니다."
카엘은 자신의 말을 끝으로 다시 대열의 맨 뒤로 돌아갔다. 그의 말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단순한 적의만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전사로서 내리는 냉정한 진단이자, 자신의 주군을 향한 마지막 경고와도 같았다.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루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산맥의 초입이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산맥 전체를,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무언가가 감싸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오로라가 땅으로 내려앉은 듯한,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것은 희미하게 반짝이며, 살아있는 생물처럼 천천히 물결치고 있었다. 그 장벽을 경계로, 바깥세상의 풍경과 산맥 내부의 풍경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저것이... '백룡의 숨결의 장막'이다."
발레리우스가 경외심과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백색의 마녀가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고대의 대마법이지. 용족의 왕이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결계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지? 저 마녀를 불러내기라도 해야 하나?"
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발레리우스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색의 마녀는 용족과 오랜 불가침의 조약을 맺었지. 용족의 피를 지닌 자가 정당한 이유를 대고 길을 청하면, 그녀는 결코 거부할 수 없다. 내가 직접 교섭을 시도하겠다."
발레리우스는 일행을 뒤에 세우고, 홀로 장막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건틀릿을 벗고 맨손으로 차가운 장막의 표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용족의 가장 오래된 고대어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장엄하게 울려 퍼지며,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장막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푸른빛과 은빛의 파동이 더욱 거세게 일렁이며, 마치 그를 받아들일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희망이 보였다. 자하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루아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위이이이잉-!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고요하던 장막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푸르고 은은하던 빛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적대적인 붉은빛으로 변했다. 발레리우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손바닥은 심한 화상을 입은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크윽... 이게 무슨...!"
그가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장막은 마치 분노한 짐승처럼 붉은 번개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일행 전체를 위협했다.
"대체 어찌 된 겁니까! 조약이 깨지기라도 한 겁니까?"
카엘이 발레리우스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아니다! 조약은 유효해! 하지만... 장막이...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어!"
발레리우스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루아였다. 붉은 장막이 내뿜는 모든 적의는 정확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장막은 그녀를 이물질로, 자신의 영역을 오염시킬 가장 끔찍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젠장, 저 계집 때문이었나!"
카엘이 욕설을 뱉으며 루아를 일행의 뒤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장막의 분노는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결계를 모욕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때, 장막의 표면이 거울처럼 맑아지며, 그 안에 거대한 눈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세월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파충류의 눈, 혹은 고대의 존재가 지녔을 법한 차갑고도 순수한 지성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도,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바람이 협곡을 스치는 소리, 세상의 모든 무기물이 한꺼번에 말하는 듯한 비인간적인 목소리였다.
『어리석은 용의 아이들아.』
목소리는 동굴 전체를, 아니, 그들의 정신을 직접 울렸다.
『감히 죽음을 내 정원으로 끌고 들어오려 하는가.』
"백색의 마녀시여!"
발레리우스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는 도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악한 저주에 걸려 고통받고 있나이다! 부디 그 지혜로..."
『고통?』
목소리가 그의 말을 비웃듯 끊었다.
『저것은 고통받고 있지 않다. 저것은 깨어나고 있다. 너희가 가져온 것은 저주받은 인간이 아니라, 공허를 품은 새로운 그릇일 뿐.』
자하르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마녀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너희는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환자를 샘의 근원으로 데려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저것이 내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내 정원의 모든 마나가 오염되고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정녕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자하르가 절박하게 외쳤다. 루아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 희망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장막에 떠오른 거대한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자하르의 등 뒤에 숨어 떨고 있는 루아에게서, 자하르에게로 옮겨왔다. 마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차갑고, 잔인한 선고처럼 울려 퍼졌다.
『방법은 있다.』
실낱같은 희망에 자하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릇이 이미 금이 갔으니, 내용물을 덜어낼 수는 없지. 허나, 그릇과 내용물을 한꺼번에 소멸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소멸... 이라니, 그게 무슨..."
『그 여인을 내게 데려와라.』
목소리는 한 치의 감정도 없이, 마치 낡은 물건을 버리라고 말하듯 평온하게 이어졌다.
『내가 그 영혼이 공허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고통 없이 존재를 지워주겠다.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