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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맹세는 밤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한숨에 불과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자하르는 제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눈앞에서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는 루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애써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지만, 어깨의 미세한 떨림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마치 온몸의 온기를 빼앗긴 사람처럼, 그녀의 존재 자체가 희미하게 바래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 위에서 불길하게 맥동하는 검은 펜던트. 저것은 본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저주였다. 자신의 핏줄에 흐르는 오만과 절망이 낳은 끔찍한 대가였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무게가,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이고 용감했던 여인의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하네. 이 평원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언제 리안의 추격이 닿을지 몰라."
선두에서 길을 이끌던 발레리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연륜 있는 침착함 대신, 초조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흥, 저 인간 계집의 보폭에 맞추다가는 해가 중천에 떠도 제자리걸음이겠군. 차라리 내가 들쳐 업고 가는 게 빠르겠다."
맨 뒤에서 경계를 서던 카엘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의 말은 루아를 향한 비난인 동시에, 그녀를 부축하며 느릿하게 걷는 자하르를 향한 질책이기도 했다.
"그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자하르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마력은 거의 바닥났지만, 그의 목소리에 서린 살기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루아를 부축한 팔에 힘을 주며, 마치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려는 듯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피부는 온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온기마저 차갑게 식혀버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괜찮아요, 왕자님.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루아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핏기 없는 입술 위로 그려진 미소는, 금이 간 유리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심장께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손가락 끝의 감각마저 무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머릿속을 맴도는 이질적인 속삭임이었다.
『추워... 더... 온기가 필요해...』
그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펜던트 안에 갇힌 공허가, 마치 굶주린 아귀처럼 그녀의 의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루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불길한 환청을 떨쳐내려 애썼다.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무너지면, 자하르가 더 힘들어할 것이다.
그렇게 위태로운 동행이 계속되었다. 네 사람은 누구도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저 ‘백색의 마녀’라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에 의지한 채, 차가운 달빛 아래 그림자를 길게 끌며 나아갈 뿐이었다.
***
그들이 ‘망자의 한숨 골짜기’에 들어선 것은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발레리우스의 말에 따르면, 혹한의 어금니 산맥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골짜기는 이름 그대로, 살아있는 것들의 온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음습한 안개로 자욱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짙은 안개는 시야뿐만 아니라 소리마저 집어삼켜, 동료의 발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렸다.
"젠장, 기분 나쁜 곳이군. 마력의 흐름이 온통 뒤엉켜 있어."
카엘이 워해머를 고쳐 쥐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거친 목소리마저 안개에 먹혀 축축하게 울렸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게. 이 골짜기의 안개는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야. 패배한 원혼들의 절망이 뭉쳐 만들어진 것. 방심하는 순간, 가장 깊은 절망을 보여주며 정신을 앗아갈 걸세."
발레리우스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루아의 걸음이 휘청였다.
"루아!"
자하르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호흡은 가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가..."
"들려요...?"
루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뭐가 들린다는 거지?"
"비명 소리... 살려달라고... 너무 춥고 배고프다고... 울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자하르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귀에는 그저 음산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골짜기의 원혼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잠든 공허를 감지하고, 동족을 부르듯 이끌고 있는 것이리라.
『이리 와... 우리와 함께하자...』
『고통스럽지? 힘들지? 모든 걸 내려놓으면 편해져...』
펜던트의 속삭임과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하나로 뒤섞여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따뜻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색을 잃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무의미한 잿빛 풍경으로 변해갔다. 사냥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버텨왔던 모든 의지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홀린 듯, 자하르의 팔을 뿌리치고 안갯속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아, 안 돼! 정신 차려!"
자하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는 텅 빈 눈으로 그를 밀어내고 계속 나아가려 했다.
"비켜주세요... 저기... 저기 따뜻한 곳이 있어요... 이제 그만 쉬고 싶어요..."
그때였다. 카엘이 성큼성큼 다가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 계집이 단체로 죽을 작정인가! 정신 못 차려?"
"그 손 놔!"
자하르가 카엘의 손목을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야! 이 안개가 그녀의 저주를 자극하고 있다고!"
"그럼 어쩔 셈이지? 이 자리에서 저 계집이 미쳐 날뛸 때까지 기다려 줄까? 아니면 저 절벽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 구경이라도 할 텐가!"
카엘이 가리킨 곳은 안개 너머, 아득한 낭떠러지였다. 루아는 정말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단 몇 걸음 만에 허공으로 발을 내디딜 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하르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루아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떨리는 몸을 뒤에서부터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이 그녀의 등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루아, 내 목소리 들어. 제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안개의 유혹을 몰아내려는 듯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네가 들은 건 전부 거짓이야.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따뜻한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가져와,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가죽 갑옷 너머로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길 느껴봐. 내가 여기 있어. 네가 말했잖아. 내가 어둠에 잠식되면, 네가 빛이 되어주겠다고. 그럼 이제 내 차례야. 네가 길을 잃으면, 내가 네 등대가 되어줄게.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나한테로."
그의 목소리는 애원으로 시작해, 절규로 끝났다. 그의 체온, 그의 심장 소리, 그의 간절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쐐기가 되어, 그녀를 옭아매던 절망의 안개를 꿰뚫었다.
루아의 텅 비었던 갈색 눈동자에, 아주 천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닫고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발끝은, 이미 낭떠러지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왕...자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흐느낌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와락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안도감과 공포, 그리고 자신을 놓지 않아 준 그에 대한 고마움이 뒤섞여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카엘과 발레리우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카엘의 눈빛은 이전의 노골적인 적의와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
골짜기를 겨우 빠져나온 일행은, 산맥의 초입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모닥불을 피웠지만, 동굴 안의 한기를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루아는 모닥불 바로 앞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골짜기에서의 일 이후, 그녀는 완전히 기력을 잃었다. 자하르가 건네준 물을 간신히 몇 모금 마셨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무릎을 감싸 안은 채, 타닥거리는 불꽃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에 깊은 생채기가 난 것이 분명했다.
자하르는 그런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는 자신의 낡은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다.
"왕자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발레리우스가 동굴 입구 쪽에서 그를 조용히 불렀다. 카엘은 루아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동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자하르는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레리우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저 아가씨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발레리우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망자의 골짜기에서, 저는 저 펜던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흐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개는 분명 저 아가씨의 정신을 공격했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니?"
"펜던트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발레리우스의 말에 자하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펜던트는 공허를 봉인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봉인 방식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발레리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끔찍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펜던트는 공허를 그저 가두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가씨의 생명력과 영혼을 제물로 삼아, 공허의 마력을 '정화' 혹은 '동화'시키려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독을 해독하기 위해 더 강한 독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골짜기의 절망적인 기운이 아가씨를 덮쳤을 때, 펜던트는 그것을 막는 대신... 오히려 그 기운을 빨아들여 공허를 중화시키는 연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말은... 루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건가?"
"그보다 더 최악입니다, 전하."
발레리우스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잠겨들었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아가씨의 영혼과 공허의 경계는 점점 더 희미해질 겁니다. 펜던트는 저주를 정화하는 동시에, 아가씨의 존재 자체를 공허와 뒤섞어 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녀는 지금... 저주를 봉인하는 '감옥'이 아니라, 저주를 담아낼 새로운 '그릇'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하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동굴 벽을 짚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던 펜던트가, 사실은 그녀를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파괴하고 있었다는 진실.
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모닥불 옆에 웅크리고 잠든 루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붉은 불빛이 위태롭게 어른거렸다. 그는 지금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말하고, 함께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소리치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자하르는 보았다.
잠들어 있던 루아의 눈이, 소리 없이 스르륵 뜨였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뻗은 그녀의 손은, 온기를 쬐려는 사람의 손짓이 아니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을 만지려는 듯, 호기심과 탐욕이 뒤섞인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방금 전 골짜기에서 보았던 공허한 눈빛과는 또 달랐다.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는 듯한 섬뜩한 이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자하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루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묘하고도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여, 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