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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제24화: 깨진 그릇, 검은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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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죽었다.

루아가 자하르의 이름을 부르짖는 절규도, 발레리우스의 경악에 찬 신음도, 카엘이 검을 고쳐 쥐며 내는 금속성 마찰음도. 그 모든 것이 자하르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작은 검은 구체 속으로 게걸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세상이 갑자기 진공 상태가 된 듯한 이질적인 침묵. 그것은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존재했던 모든 파동을 지워버리는, 적극적인 ‘무(無)’의 잠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굴 입구에서 새어 나오던 새벽의 여명도, 희미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의 잔광도, 심지어는 그들의 눈에 맺힌 빛의 잔상마저 검은 구체를 향해 부자연스럽게 휘어지며 빨려 들어갔다. 주변의 온도가 급강하했다.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숲의 공기가 순식간에 혹한의 겨울밤처럼 변했다. 살을 에는 냉기는 뼈를 파고드는 공포 그 자체였다.

"왕자님… 정신 차려요! 저예요, 루아!"

루아는 이 모든 기현상의 중심에 선, 텅 빈 눈의 남자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은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제발, 나를 봐줘. 나를 기억해줘.

"멈춰라, 아가씨! 더 이상 다가가면 위험해!"

그녀의 팔을 잡아챈 것은 카엘이었다. 그의 손은 강철 갈고리처럼 단단했고,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앞의 존재를 향한, 전사로서의 본능적인 공포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저것은 더 이상 자신이 섬기던 주군이 아니었다. 저것은 통제 불능의 재앙, 살아 숨 쉬는 세상의 종말이었다.

"이거 놔요! 놔! 자하르!"

루아는 발버둥 쳤지만, 카엘의 악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던 그의 맹세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끔찍한 결과란 말인가.

"저것은… 순수한 허무 그 자체야. 이전의 저주와는 차원이 달라."

발레리우스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늙은 용조차, 저토록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힘은 고대의 기록 속에서나 접했을 뿐이었다.

"저 구체가 만약 제어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면… 이 산맥 전체가 지도 위에서 지워질 걸세."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하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핏줄이 흉측하게 돋아났고, 입에서는 검은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영혼이라는 그릇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도 거대한 내용물을 담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손 위에 떠 있던 검은 태양, 공허의 구체가 불안정하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마치 폭발 직전의 마력 코어처럼.

"젠장! 모두 엎드려!"

카엘이 루아를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으며 땅으로 쓰러졌다. 발레리우스는 남은 마력을 쥐어짜 방어 결계를 펼쳤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그 찰나였다.

후우.

마치 깊은 한숨을 내쉬듯, 검은 구체가 스르르 자하르의 손바닥 안으로 다시 흡수되었다. 소리와 빛과 온기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던 포식자는, 다음 식사를 위해 잠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힘을 가까스로 회수한 자하르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

정적이 흘렀다.
공허의 힘이 사라지자, 세상은 원래의 물리법칙을 되찾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세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 앞을 채웠다. 루아는 카엘의 품에서 뛰쳐나가 쓰러진 자하르에게로 달려갔다.

"자하르!"

그녀는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다행히 희미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텅 비어 있던 그의 푸른 눈은, 지금은 감겨 있었다. 그저 잠든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루아는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평화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발레리우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는 마녀와의 거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 결과가 이토록 끔찍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 되긴요. 명백하지 않습니까."

카엘이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뽑았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쓰러진 자하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왕자 전하께서는 괴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저분의 숨이 다시 붙어, 저 힘을 또다시 개방하기 전에…"

그의 손이 다시 검자루 위로 올라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루아는, 경악하며 자하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안 돼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비켜라, 인간. 이것은 더 이상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용족 수호자로서, 세상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할 의무가 있다. 설령 그 대상이 내가 목숨 바쳐 섬기던 주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전사였고, 전사는 더 큰 위협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괴물이 아니에요! 아직 왕자님이라고요! 단지… 단지 아플 뿐이에요!"

"저것이 고통으로 보이느냐!"

카엘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분노가 실렸다.

"저것은 힘이다! 세상을 무로 되돌릴 수 있는 절대적인 힘! 그 힘에 취해, 너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던 것을 보지 못했나! 다음번에 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목이 잘리는 것은 네가 될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그들의 머릿속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백색의 마녀였다.

『소란스럽군, 필멸자들. 너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소리는 이전처럼 장막 너머가 아닌,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네년이…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발레리우스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저 여인의 영혼에서 공허를 깨끗이 분리했지. 그리고 너희의 왕자는 새로운 그릇이 되었다. 그뿐이다.』

"그뿐이라고? 그는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해! 자신의 힘에 잠식당하고 있단 말이다!"

루아가 울부짖었다.

『당연한 결과다.』

마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처럼 차가웠다.

『깨지고 금이 간 그릇에서 내용물을 옮기면, 새 그릇 역시 불안정해지는 법. 그의 영혼은 지금 공허의 무게에 짓눌려 산산조각 나 있다. 기억도, 자아도, 감정도. 모든 것이 허무의 바다 아래 가라앉았지. 지금의 그는 텅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의지 없이, 본능적으로 힘을 내뿜는 재앙 덩어리일 뿐.』

마녀의 말은 그들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최악의 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자하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를 되돌릴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

루아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물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심장이 멈칫했다.

『그릇이 비어있다면, 다시 채우면 될 일. 허무가 그의 심장을 차지했다면,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로 허무를 밀어내면 된다.』

"그게… 그게 뭔데!"

자하르가 다급하게 물었다.

『태초의 힘이다. 세상이 처음 만들어질 때, 공허와 빛이 뒤엉켜 있던 혼돈의 시대. 그 시대의 유물을 찾아, 그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의 핏줄에 흐르는 용의 힘과 태초의 유물이 공명한다면… 기적적으로 그의 자아를 되찾고, 공허를 통제할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지.』

"태초의 유물…?"

발레리우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시원의 심장’을 말하는 건가? 그건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가! 세상이 끝나는 날, 모든 것을 재창조한다는 신의 조각이라고 불리는!"

『전설은 종종 진실을 담고 있지, 늙은 용이여.』

마녀는 시인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 당장!"

루아가 소리쳤다.

『내가 왜?』

마녀의 대답은 얼음송곳처럼 날아와 박혔다.

『나는 거래를 이행했다. 너희의 사정에 더 이상 관여할 이유는 없지. 그릇을 되살리든, 깨뜨려 버리든, 이제는 너희의 선택이다. 다만…』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겼다.

『그 텅 빈 그릇을 노리는 자가 나 하나뿐일 거라 생각하지는 마라. 세상에는 순수한 공허의 힘을 탐내는 자들이 아주 많거든. 특히, 용족의 피로 단련된 최상의 그릇이라면 더더욱.』

그 말을 끝으로, 마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마녀가 남기고 간 말은 희망인 동시에, 절망적인 예언이었다.

‘시원의 심장’. 용족의 가장 오래된 서고에서도 단 몇 줄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신화 속의 물건. 그것을 찾아야만 자하르를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자하르는 움직이는 시한폭탄이자, 세상 모든 악당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카엘이 처음으로 발레리우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의 눈빛은 깊은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주군을 베어야 한다는 전사의 결의와, 그를 되살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사이에서 그의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다.

발레리우스는 대답 대신, 루아의 품에 안겨 미동도 없는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고뇌는 카엘의 것보다 몇 곱절은 더 깊고 어두웠다.

"이졸데 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하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모두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미쳤습니까! 그분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카엘이 경악했다.

"그분께서는 왕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을 불태워서라도 시원의 심장을 손에 넣으려 드실 분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왕자 전하를 완벽한 ‘병기’로 이용하려 하실 겁니다! 공허의 힘을 품은 용의 왕자라니, 그분께는 그 무엇보다도 탐나는 장기 말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네!"

발레리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 시원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면 용족의 가장 깊은 지식이 필요해! 그리고… 마녀의 말대로, 수많은 적들이 왕자 전하를 노리고 몰려들 걸세! 리안,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자들까지! 우리 셋만으로는… 결코 전하를 지켜낼 수 없단 말일세!"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들의 여정은 이제 더 이상 한낱 저주를 풀기 위한 밀행이 아니었다.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품은 존재를 지키고, 신화 속의 유물을 찾아야 하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그들의 격렬한 대화를 듣는 동안, 루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하르의 차가운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슬픔과 절망이 너무 깊어, 오히려 그 바닥을 치고 올라온 차가운 분노와 강철 같은 결의가 그녀의 영혼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괴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그를 위해 악마가 되어야 할 차례다.

루아는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두 용족 수호자를 돌아보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단단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족의 땅으로 돌아가세요."

"아가씨…?"

"두 분은 돌아가서, 그 이졸데라는 분을 설득하든, 정보를 찾아내든, 뭐든 하세요. 저는… 제가 할 일이 있어요."

"혼자서 어딜 가겠다는 겐가! 지금 아가씨 혼자서는 아무것도…"

카엘이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루아의 눈빛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더 이상 지켜져야 할 연약한 사냥꾼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고독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장막 앞에 떨어져 있던, 자하르의 낡은 가죽 주머니였다. 그녀는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초승달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공허를 모두 빼앗긴 펜던트는, 이제는 그저 평범한 은 조각에 불과했다.

루아는 그 펜던트를 자신의 목에 다시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쓰러진 자하르의 손을 들어, 그의 차가운 손가락으로 펜던트를 한번 쥐게 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자하르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공허의 마력이 펜던트에 닿는 순간, 펜던트가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검은빛도, 붉은빛도 아니었다. 모든 어둠을 정화할 것처럼, 순수하고 영롱한 백색의 빛이었다.

그리고 루아의 머릿속으로,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루아…』

자하르의 목소리였다. 의식이 아닌,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남겨진 마지막 파편이, 그녀의 영혼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였다.

그녀는 보았다.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단 하나의 길을.
그를 되찾을 수 있는, 오직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