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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제25화: 길의 끝에서,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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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의 땅으로 돌아가세요."

그것은 간청이 아니었다. 얼음 조각 같은 단어들이,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두 용족 수호자의 고막에 날카롭게 박혔다. 루아는 더 이상 그들의 보호를 받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남자의 무게가 오히려 그녀를 꼿꼿이 서게 만드는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다.

"미친 소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카엘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경악이 아닌, 노골적인 경멸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리려 했던 대상을 지키겠다며 나서는 이 가소로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년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이 껍데기만 남은 왕자 전하를 끌고 소꿉놀이라도 할 셈인가? 하루도 못 가서 산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전하의 폭주에 휘말려 뼈도 못 추리게 될 거다."

"그건 제 알 바예요."

루아는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희미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심장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루아…』

다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그녀만의 등대였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방식대로 정보를 찾으세요. 이졸데 여왕을 찾아가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저는 제 방식대로 길을 찾을 겁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시원의 심장’이라는 것을."

"아가씨, 그건 무모한 짓일세."

침묵을 지키던 발레리우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시원의 심장은 신화 그 자체일세. 그것을 찾는 여정은 용족 전체의 명운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대업이야. 인간인 아가씨 혼자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

루아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미동도 없는 자하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뺨, 굳게 닫힌 입술.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차가운 육신 아래, 허무의 바다 가장 깊은 곳에 그의 영혼이 미약하게나마 깜박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여기에 있어요.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줄 겁니다."

그녀는 증명하듯, 자신의 손을 자하르의 손 위에 겹쳤다. 그리고 펜던트를 쥔 다른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그러자 방금 전과 같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백색의 빛이 펜던트에서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그 빛에 반응하듯, 자하르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꿈틀거렸다.

그 광경에 카엘과 발레리우스는 숨을 삼켰다. 저것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공허의 그릇이 된 왕자와, 저 인간 여자 사이에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유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카엘이 마침내 항복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아까와 같은 노골적인 적의는 사라져 있었다.

"어째서 전하의 힘이… 너에게만 반응하는 거지?"

"아마도… 제가 그를 가장 간절하게 부르고 있으니까요."

루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낡은 천으로 자하르의 몸을 둘러메기 시작했다. 사냥꾼 시절 익혔던, 부상자를 옮기는 방법이었다. 성인 남자의 무게는 버거웠지만, 그녀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해가 뜨면 떠날 겁니다. 행운을 빌어요, 두 분 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니까."

그녀의 결연한 태도에, 발레리우스는 더 이상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비상금일세. 그리고 이 지도는 대륙의 주요 길과 도시들이 표시되어 있지. 부디… 부디 몸조심하게. 그리고 왕자 전하를… 부탁하네."

카엘은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그의 방식대로 건네는 인정이자 경고였다.

"죽지 마라, 인간. 네년이 죽으면, 저분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 하니.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살아서 그 해답을 가져와."

그렇게 그들은 갈라섰다. 두 명의 용족 수호자는 용족의 땅을 향해, 한 명의 인간 여자는 신화 속 유물을 향해. 누구의 길이 더 험난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채, 각자의 지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

여정은 고행 그 자체였다.
루아는 자하르를 등에 업거나, 때로는 조잡하게 만든 썰매에 눕혀 끌며 나아갔다. 낮에는 끝없이 걷고, 밤에는 동굴이나 나무 아래서 쪽잠을 잤다. 음식은 숲에서 구한 열매나 작은 짐승으로 해결했다. 그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지만, 눈빛만은 날이 갈수록 형형하게 빛났다.

자하르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듯 누워 있었다. 그는 숨을 쉬고, 심장이 뛰었지만, 그뿐이었다.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그가 발작하듯 몸을 경련하며 공허의 힘을 터뜨리려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루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자하르. 내가 여기 있어. 무서워하지 마."

그녀는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이며, 펜던트를 그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펜던트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빛이 그의 폭주를 기적처럼 잠재우곤 했다. 그 과정은 루아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듯한 극심한 피로를 동반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그를 되돌릴 유일한 방법이었고,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였다.

그녀에게는 목적지가 있었다. 바로 ‘잿빛 교차로’라 불리는 무법지대였다.
대륙의 모든 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왕국의 법이 닿지 않는 중립 도시.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정보와 비밀이 거래되는 거대한 암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시원의 심장’ 같은 신화 속 물건에 대한 단서라도 얻으려면,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더 걸었을까. 마침내 잿빛 깃발이 나부끼는 도시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는 이름처럼,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퇴색된 잿빛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성벽은 수많은 전투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낯선 향신료와 매캐한 연기, 그리고 마법의 잔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루아는 낡은 로브로 자하르의 얼굴을 깊숙이 가리고, 자신도 후드를 눌러쓴 채 성문으로 들어섰다. 경비병들은 그녀와 그녀가 끌고 가는 짐(자하르)을 힐끗 쳐다봤지만, 별다른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에서는 남의 사정에 간섭하는 것이 가장 큰 금기였다.

시장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난생 처음 보는 종족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고, 좌판에는 금지된 마법 스크롤과 괴물의 신체 부위, 출처 불명의 보석들이 보란 듯이 진열되어 있었다. 루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시장의 가장 후미진 골목으로 향했다. 발레리우스가 준 지도에 표시된, 정보 상인들이 모여 있다는 곳이었다.

그녀는 ‘까마귀 둥지’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두컴컴했고,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서 있자, 바 테이블 안쪽에 앉아 있던, 얼굴 전체를 그림자로 가린 인물이 나른하게 고개를 들었다.

"뭘 원하지, 길 잃은 아가씨? 술? 아니면 하룻밤 묵어갈 남자?"

목소리는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중성적인 톤이었다.

"정보를 사러 왔어요."

루아는 주눅 들지 않고, 똑바로 상대를 마주 보며 말했다.

"‘시원의 심장’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그녀의 말에, 그림자 속 인물이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빛이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아가씨로군. 그딴 물건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혀가 뽑혀도 할 말 없는 거 모르나?"

"그래서 값을 치르러 왔잖아요."

루아는 발레리우스가 준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금화가 부딪혔다.

그림자 속 인물, ‘까마귀’라 불리는 정보상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루아의 행색과, 그녀가 끌고 온 짐, 그리고 그녀의 눈에 서린 절박하면서도 강인한 빛을 가늠하고 있었다.

"좋아. 그 용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까마귀는 금화 주머니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원의 심장. 세상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신의 눈물이라고도 하지. 전설에 따르면 그걸 손에 넣는 자는 죽은 자를 되살리고, 세상을 재창조할 힘을 얻게 된다더군. 하지만 전설에는 언제나 빠져있는 구절이 있지. 바로 ‘대가’에 대한 거야."

"대가?"

"그래. 시원의 심장은 순수한 생명력의 결정체다.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려면, 그에 필적하는 ‘공허’를 제물로 바쳐야만 해. 빛이 있으려면 그림자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

까마귀의 말에 루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공허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럼… 공허의 힘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그 힘을 이용해 시원의 심장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뜻인가요?"

"정확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물이 된 공허는 완전히 정화되고 소멸하지. 그 안에 담겨 있던 영혼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될 거고. 말 그대로, 저주를 풀고 영혼을 재탄생시키는 기적이 일어나는 거야."

희망이 보였다. 루아의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자하르를 구할 유일하고도 완벽한 방법이었다.

"그게 어디 있죠? 제발 알려주세요. 어디로 가야 그걸 찾을 수 있죠?"

"알려줄 수는 있지. 하지만 그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게 있어."

까마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는 턱을 긁으며, 마치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루아를 쳐다보았다.

"너, 요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수배서에 대해 들어봤나?"

"수배서요?"

"그래. 제국에서 직접 내린 최고 등급 수배령이야. 현상금이 어마어마하지. 웬만한 소왕국의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거든. 덕분에 이 바닥의 사냥꾼이란 놈들은 전부 눈에 불을 켜고 그년을 찾아다니고 있지."

까마귀는 품속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그것은 분명 수배서였다. 위쪽에는 거친 목탄으로 그린 여자의 초상화가, 아래쪽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루아는 무심코 그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칠게 그려졌지만, 그 얼굴은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이… 이건…."

"제법 닮았지? 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린 모양이야."

까마귀가 낄낄거렸다. 루아는 떨리는 손으로 수배서를 집어 들었다. 초상화 아래, 큼지막하게 적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 아래 적힌 죄목을 읽는 순간, 그녀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태양의… 심장?"

그녀가 멍하니 그 단어를 되뇌는 순간, 까마귀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혼란을 꿰뚫었다.

"그래. ‘시원의 심장’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