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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를 죽인 채, 나는 황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카엘이 떠난 후, 내 손에 남은 고대의 양피지는 더 이상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옭아매는 운명의 족쇄이자, 동시에 이 모든 진실을 파헤칠 유일한 열쇠였다. ‘레나’라는 내 이름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밤새도록 내 심장을 차가운 손으로 옭아매고 있었다. 복수심으로 불타던 심장이, 이제는 정체 모를 불안감으로 차갑게 식어갔다.
황궁의 중앙 도서관, 그중에서도 황족에게조차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금서고. 그곳이라면 레프니아 가문이나 고대 마법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나를 이끌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나는 등불의 희미한 빛에 의지했다. 대리석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육중한 떡갈나무 문 앞에 서자, 퀴퀴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문을 지키는 늙은 사서는 졸고 있는지 미동도 없었다. 나는 황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인장을 보여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황실의 명이다. 제국의 고대 역사에 관한 자료를 열람하겠다.”
사서는 실눈을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스치는 것은 존경이 아닌, 귀찮음과 미미한 의심이었다.
“전하, 이곳의 서적들은… 제국의 어두운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굳이 들추어 좋을 것이 없는 기록들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메마른 나뭇잎 같았다.
“그 어둠을 밝히는 것이 황족의 의무이기도 하지. 길을 비켜라.”
내 단호한 어조에 사서는 마지못해 몸을 움직여 자물쇠를 풀었다. 삐걱거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책이라는 이름의 무덤에 들어서는 듯한 서늘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서가에는 제국의 영광이 아닌, 숨겨진 상처와 비밀들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카엘이 건네준 고문서의 문양을 기억하며 관련 서적을 찾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 ‘북부의 잊힌 가문들’, ‘금지된 의식’. 제목만으로도 오싹한 기운이 풍기는 책들 사이를 헤맸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발밑에 채이는 낡은 가죽 표지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다. 호기심에 책을 펼치자,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숨을 멈췄다. 책의 첫 장에, 카엘의 고문서에 있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알아볼 수 없는 고대 상형문자들이 가득했지만, 중간중간 제국 공용어로 주석이 달려 있었다.
‘붉은 달의 밤, 세상의 균형이 무너질 때, 고대의 영혼이 그릇을 찾아 깨어난다.’
나는 침을 삼키며 다음 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영혼을 담는 그릇을 일컬어 ‘레나(Rena)’라 하니, 이는 ‘다시 태어난 자’ 혹은 ‘계승자’를 의미하는 고대의 언어다. 레나는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다가 각성의 때가 오면, 가문의 힘과 기억을 모두 계승하여….’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레나.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하나의 ‘직위’ 혹은 ‘존재’를 칭하는 단어였다. 이전 생의 무력했던 황녀 레나가 아니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 그것이 바로 ‘레나’였다. 회귀한 것조차 나의 의지가 아닌, 이 거대한 운명의 일부였단 말인가? 복수를 위해 돌아온 내 삶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던 걸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서가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그나마 나를 현실에 붙들어맸다. 카엘은… 카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내게 고문서를 건넨 것은, 내가 바로 그 ‘레나’라는 것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을까? 그가 나를 죽인 이유, 그리고 이번 생에 나를 돕는 이유, 그 모든 것의 조각이 이 끔찍한 진실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금서고의 문이 다시 한번 삐걱거리며 열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늙은 사서일까? 아니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것은 화려한 장신구가 반사하는 날카로운 빛과, 익숙하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은 향이었다.
“이 깊은 밤, 먼지 쌓인 과거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니, 레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황비 마마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며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황급히 책을 등 뒤로 감추고 몸을 돌려 예를 갖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황비 마마, 어인 일로 이곳까지….”
“네가 밤늦도록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단다. 설마하니, 제국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혼자 짊어지려 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에서 풍기는 짙은 백합 향이 금서고의 먼지 냄새를 밀어내고 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숨이 막혔다. 그녀의 시선은 내 등 뒤, 내가 감춘 책을 향해 있었다.
“어리석구나, 레나. 그 책에 담긴 진실은,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란다.”
그녀의 말은 내가 책의 내용을 이미 파악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마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복수를 위해 냉정을 유지하려 했던 모든 노력이 그녀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네가 알아야 할 모든 것, 그리고 네가 알아서는 안 될 모든 것을 알고 있지.”
황비 마마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카엘 드 로안. 그 아이가 벨라스 가문으로 향했다고 들었다. 아주 흥미로운 움직임이야. 북부의 늑대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사냥을 즐기지. 하지만 명심하렴, 레나. 굶주린 늑대는 주인의 손을 무는 법이란다.”
그녀는 카엘에 대한 불신을 다시 한번 내 마음속에 심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그녀의 말은 독처럼 스며들어 나의 판단력을 흐렸다.
“그 아이는 제국의 충신입니다. 지금은….”
“지금은? 그래,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 역시 마찬가지고.”
그녀는 내 손에서 책을 빼앗는 대신,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벨라스 가문은 예로부터 희귀한 독을 다루는 데 능했지. 만약 카엘 경이 그들에게 해를 입는다면, 이것이 유일한 해독제가 될 게다. 그를 살릴지 말지는… 오롯이 너의 선택에 달렸어.”
그녀의 말은 구원이 아닌 저주처럼 들렸다. 이것은 그녀가 내게 내리는 또 다른 시험이었다. 카엘을 의심하면서도 그를 살릴 기회를 내 손에 쥐여주다니. 그녀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로부터 이득을 취할 생각인 것이다.
“기억하렴, 레나. 너는 황녀이기 이전에, 이 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다. 개인적인 복수심 따위는 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야. 진정으로 제국을 지키고 싶다면 말이지.”
황비 마마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금서고 안에는 그녀의 백합 향이 오랫동안 머물며 나를 질식시킬 듯 맴돌았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손에는 내가 ‘레나’라는 진실이 담긴 금서가, 다른 한 손에는 카엘의 목숨을 쥔 해독제가 들려 있었다. 복수, 운명, 제국, 그리고 카엘 드 로안. 모든 것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그때였다. 닫힌 창문 틈으로 작은 무언가가 휙 날아들어와 내 발치에 떨어졌다. 작은 돌멩이에 묶인 양피지 조각이었다. 황궁의 경비를 뚫고 누군가 내게 직접 보낸 밀서. 심장이 세차게 울렸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피처럼 붉은 잉크로 휘갈겨져 있었다.
‘붉은 달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로안의 늑대를 믿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