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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화: 늑대의 함정, 황녀의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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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유리병의 감촉, 바스러질 듯한 양피지의 질감이 손끝에서 현실을 일깨웠다. 황비의 백합 향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잔향이 환각처럼 코끝을 맴돌며 숨통을 조였다. 금서고의 공기는 묘비명처럼 무거웠고, 내 손에 들린 두 개의 물건은 각기 다른 무게로 내 영혼을 짓눌렀다. 하나는 내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진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를 죽인 남자의 목숨이었다.

‘붉은 달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로안의 늑대를 믿지 마라.’

피처럼 붉은 잉크로 쓰인 경고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모든 혼돈의 배후에 황비 외에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들 역시 나를, ‘레나’를 주시하고 있음을 알리는 섬뜩한 선언이었다. 나는 대체 누구의 장기판 위에 올라선 말인가. 황비인가, 붉은 달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계획했을지도 모를 카엘인가.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 냉정해져야 한다. 이전 생에서 나는 감정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었다. 이번 생에서는 달라야 했다. 나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힘을 주어 꼿꼿이 섰다. 해독제가 담긴 유리병과 밀서를 드레스 깊숙한 곳에 숨기고, ‘레나’의 진실이 담긴 금서를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지금은 이 진실을 감당할 때가 아니었다. 먼저 눈앞의 적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바로잡으며 늙은 사서에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소문만 무성한 곳이로군.”

내뱉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백작 에드윈을 호출했다. 동이 트기 전의 푸른 어둠이 창밖을 감싸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조언자, 나의 유일한 편. 하지만 그에게조차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회귀와 ‘레나’의 비밀은 오롯이 나 혼자 짊어져야 할 저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 백작이 급히 내 처소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의 단정한 용모에는 잠을 설친 기색과 함께 나에 대한 깊은 우려가 어려 있었다. 그는 내가 내민 따뜻한 차는 받지도 않고 곧장 본론을 물었다.

“전하, 이 이른 시각에 저를 부르신 연유가 무엇입지, 안색이 몹시 좋지 않으십니다.”

그의 곧은 눈빛은 언제나처럼 나에게 작은 안정을 주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백작. 어젯밤, 황비 마마께서 나를 찾아오셨소.”

“황비 전하께서 말입니까? 금서고에서요?”

에드윈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가 나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음에 놀랐지만, 지금은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마치 내가 그곳에 갈 줄 알았다는 듯이. 그분은… 카엘 경에 대한 불신을 내게 심어주려 했지. 그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 경고하면서, 이걸 주셨소.”

나는 품속에서 해독제가 든 작은 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 액체가 촛불 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났다. 에드윈은 병을 집어 들지 않은 채, 마치 독사를 보듯 경계하며 그것을 살폈다.

“이것은… 북부 벨라스 가문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피의 눈물’을 해독하는 약입니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물건인데… 황비 전하께서 어찌 이것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소. 벨라스 가문이 카엘 경을 해치려 들 것이라는 것까지도.”

“함정입니다, 전하. 명백한 함정입니다. 황비 전하께서는 언제나 뱀의 혀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이 해독제는 전하를 시험하기 위한 미끼일 것입니다. 카엘 경을 구하신다면 그에게 빚을 지게 되고, 구하지 않으신다면 제국의 유능한 인재를 잃게 되는 책임을 전하께 돌리시려는 속셈이겠지요.”

에드윈의 분석은 정확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양피지, 붉은 잉크로 쓰인 밀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것도 받았소. 황비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아.”

에드윈은 밀서를 받아 들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붉은 달… 망할, 그자들이었군요.”

“그자들이라니? 아는 것이오, 백작?”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심각했다.

“전설로만 치부되던 이야기입니다. 제국 건국 초기, 어둠의 마법을 숭배하던 비밀 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붉은 달이 뜨는 밤에 금지된 의식을 거행하며 제국의 전복을 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의 상징이 바로 ‘피눈물을 흘리는 붉은 달’이었습니다. 몇 세기 전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 잔당이 아직도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붉은 달, 레프니아 가문, 그리고 ‘레나’.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듯한 끔찍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라면?

“그들은 왜 나에게 이런 경고를 보낸 걸까. 카엘 경을 믿지 말라니.”

“아마도… 전하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거나, 혹은 카엘 경과 전하 사이를 이간질하여 제국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속셈일 겁니다. 어느 쪽이든, 전하께서는 지금 거대한 위협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에드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전하, 부디 몸을 사리십시오. 카엘 경의 일은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로안 가문의 힘이라면 그 정도 위기는 능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섣불리 황비의 계략에 휘말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정답이었다. 카엘을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나의 복수에도, 나의 안전에도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눈빛이, ‘황녀 전하께서도 더 이상 슬픔에 잠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전 생의 그와 지금의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완벽한 연극일까. 나는 그 끝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틀이 지났다. 북부로 떠난 카엘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초조함이 독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황녀로서의 일과를 처리했지만,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황비는 나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고, ‘붉은 달’ 역시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셋째 날 정오, 마침내 북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그는 평범한 황궁 전령이 아니었다. 로안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은 군데군데 찢겨 피가 배어 있었고, 말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의무관들이 달려가 그를 부축하는 동안,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황… 녀 전하…!”

나는 차가운 예감에 휩싸여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작은 통신용 마석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내 손에 마석을 넘기자마자 의식을 잃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엘의 부관인 듯했다.

“…경께서는… 벨라스 백작의 환대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내온 환영주를 마신 직후… 각혈을…! 지금은 성의 가장 깊은 곳에 유폐되셨습니다. 성문은 굳게 닫혔고… 저희 기사단은 고립되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 윽!”

거기서 통신은 끊겼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환영주. 에드윈이 말했던 ‘피의 눈물’이라는 독이 틀림없었다. 황비의 예언이, 아니, 그녀가 짜 놓은 각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이제 공은 내게 넘어왔다. 이 해독제를 가지고 그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를 위해, 나의 안전을 위해 그를 버릴 것인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해독제가 든 작은 유리병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이전 생, 반역자의 칼에 심장이 꿰뚫리던 순간의 고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를 죽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것이 마땅한 복수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북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벨라스 가문과 붉은 달, 그리고 레프니아의 잔당들이 제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황태자 오라버니와 제국은 위태로워질 테고, 나는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목숨은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명운과 연결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계산이 충돌했다. 황비의 시험, 붉은 달의 경고, 에드윈의 충언, 그리고 나의 복수심.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질문이 내 가슴을 쳤다.

‘나는 무엇을 위해 회귀했는가?’

단순히 나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아니었다. 나는 제국을 지키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는 뒤를 돌아 소리쳤다.

“릴리! 당장 내 승마복을 가져와라! 그리고 황궁 마구간에서 가장 빠른 말을 준비시켜!”

곁에 있던 시녀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에드윈 백작이 놀라 나를 막아섰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위험합니다! 이것은 황비의 계략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해독제는 제가 보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내 푸른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결심이 비쳤으리라.

“아니, 백작. 내가 직접 가야겠소. 이것은 단순히 카엘 경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황비와 붉은 달, 그리고 나 사이의 전쟁의 시작이다. 그들의 장기판 위에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말은 더 이상 사양하겠어. 내가 직접 이 판을 뒤엎을 것이다.”

이것은 도박이었다. 내 목숨과 제국의 운명을 건 가장 위험한 도박. 하지만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복수든, 운명이든, 내 손으로 직접 그 끝을 봐야만 했다. 나는 에드윈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로안의 늑대는 죽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