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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제31화: 하나의 심장, 두 개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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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닿는 순간, 세상이 부서졌다.

물리적인 파괴가 아니었다. 내 존재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경계선, 즉 피부와 공기, 나와 너,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던 모든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감각. 그것은 빛도 소리도 없는 내파(內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동시에, 수억 개의 별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폭발했다.

「릴리아!」

카엘의 절규가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공포,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염원, 그 모든 것이 날것의 감정이 되어 내 의식 속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의 영혼이 에레보스가 펼친 중력장에 이끌려 뒤섞이며, 하나의 존재로 억지로 융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이 내 것이 되었다.

눈보라 치는 북부의 황야.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남거라, 나의 긍지”라고 속삭이던 어머니 레아의 마지막 온기. 부족의 멸망을 지켜보며 느꼈던 무력한 분노. 검은 늑대가 되어 제국을 향해 칼을 겨누던 날의 살기. 그리고 처음 황궁에서 나를 보았을 때, 증오와 함께 피어올랐던 기묘한 호기심까지. 그의 수십 년 세월이 단 1초 만에 내 영혼에 새겨졌다.

내 기억 또한 그에게 흘러 들어갔다.

반역자의 칼에 심장이 꿰뚫리던 첫 번째 생의 고통. 회귀 직후 느꼈던 지독한 고독감.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얼음 감옥에 가두었던 시간들. 어머니의 진실을 마주하고 세상이 무너지던 절망.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남자를 향해 멋대로 뛰기 시작했던 심장의 배신감까지도. 감추고 싶었던 나의 모든 약점이, 그의 영혼 앞에 벌거벗겨졌다.

“크윽… 아…!”

고통을 넘어선 감각의 폭류 속에서, 마침내 우리의 몸이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옥좌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왕좌의 감촉은 돌의 냉기가 아니었다. 수백 년 묵은 원념과 슬픔, 저주에 묶인 채 죽어간 수많은 영혼의 한숨이 서린, 살아있는 무덤의 감촉이었다.

우리는 옥좌에 앉혀졌다. 내가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기묘하고 위태로운 자세로. 그의 팔이 반사적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본능이었다.

그 순간, 푸른 섬광이 홀 전체를 휩쓸었다.

마리아를 집어삼킨 ‘세상의 눈물’이 맥동하며, 우리를 이 탑의 새로운 심장으로 인식하고 강제로 동기화를 시작했다. 뇌수를 파고드는 끔찍한 이물감과 함께, 나는 ‘보았다’. 탑의 시선으로, 저주의 시선으로. 수백 년간 이 땅에 뿌리내린 저주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내 신경계를 잠식했다. 제국의 땅 아래 거미줄처럼 얽힌 마력의 흐름, 그 흐름을 타고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이들에게 스며드는 독기, 그리고 그 독기에 좀먹혀 서서히 미쳐가거나 시들어 죽는 사람들의 끝없는 비명.

이것이 카엘이 영원히 느끼려 했던 고통이었다.
이것이 내가 파괴해야 할 대상의 진짜 모습이었다.

모든 감각이 마모되고 의식이 시스템에 완전히 흡수되기 직전,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내 쇄골 아래, 어머니가 심어놓은 ‘독’을 향해 명령했다.

‘깨어나.’

그러자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한 어둠이 눈을 떴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잿빛 사막 위에 서 있었다.

하늘은 푸른색이었지만, 그 푸른빛은 생명의 색이 아니었다. 거대한 사파이어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슬픔으로 가득 찬 서러운 빛이었다. 발밑의 모래는 부드럽지 않았다. 그것은 고운 뼛가루처럼 버석거렸고, 밟을 때마다 죽은 자의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도 없었다. 오직 거대한 상실감만이 안개처럼 떠다니며 폐부를 채웠다.

이곳이 저주의 근원, 시스템의 심상세계였다.

“……여긴.”

내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엘이었다. 그는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투명한 유령과도 같았다. 서로를 볼 수는 있었지만, 만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육체를 잃고, 의식만이 이곳에 존재하는 상태였다.

「시스템의 핵이야. 우리의 영혼이 옥좌에 연결되면서, 이곳으로 들어온 거야.」

나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 생각은 곧장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언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는, 두 개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그는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황량한 풍경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싸우고 또 지키려 했던 것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이 모든 게… 초대 황제의 기억이라고?」

「기억의 잔해겠지. 순수했던 마음이 탐욕에 오염되면서, 이렇게 삭막한 폐허만 남은 거야.」

우리는 말없이 사막을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저 서럽게 우는 푸른 하늘의 눈물이 시작되는 곳. ‘세상의 눈물’의 본체가 있는 곳.

얼마나 걸었을까. 사막 곳곳에 기이한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과거 저주에 희생된 황족들의 잔상이었다. 어떤 이는 영원히 목을 조르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의 끝없는 고통 속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동정심 따위는 사치였다. 나는 이곳에 구경을 온 것이 아니었다.

「찾아야 해. 이 세계의 핵을. 그리고 파괴해야지.」

내 결의에 찬 생각에, 카엘의 의식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릴리아, 잠시만. 무언가 이상해.」

「뭐가?」

「저 잔상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어. 저주가 그들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시스템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건가?」

그의 의문은 날카로웠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다시 잔상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저주에 잠식당했다면 영혼까지 남김없이 타버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저들은 불완전한 형태로 남아, 자신들의 고통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오류 파일처럼.

그 순간, 섬뜩한 가설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설마… 초대 황제는 저주를 만든 게 아니라, 일종의 영혼 백업 시스템을 만들려 했던 건가? 황족이 죽으면 그 영혼을 이곳에 보존해서, 언젠가 부활시키기 위한… 영생을 위한 장치를?」

「하지만 시스템이 오염되면서, 영생의 안식처가 영원한 고통의 감옥으로 변해버린 것이고.」

카엘이 내 생각을 이어받았다. 우리는 동시에 침묵했다. 진실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뒤틀려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실패한 불멸 프로젝트의 잔해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파괴해야만 해. 저 가엾은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이 끔찍한 연극을 끝내야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엘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의 유령 같은 형체가 내 앞을 가로막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안 돼.」

그의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강하게 때렸다.

「섣불리 핵을 파괴했다가는, 이 안에 갇힌 영혼들까지 전부 소멸할지도 몰라! 그건 구원이 아니라 완벽한 소멸이야. 내 어머니의 영혼 역시… 이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의 의식 속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카엘,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망설이는 순간에도, 밖의 세상에서는 저주가 퍼져나가고 있어! 몇몇 영혼을 구하자고 제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그 몇몇 영혼이 당신의 어머니라면, 그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소?」

그의 반문에, 나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내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이곳 어딘가에, 자애롭던 그 시절의 어머니가 갇혀 있다면. 나는 과연 망설임 없이 파괴를 선택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의식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그 순간, 사막의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그것은 거대한 수정 기둥이었다.

하늘의 슬픔이 모두 모여 응축된 듯, 깊고 투명한 푸른빛을 발하는 결정체. ‘세상의 눈물’의 본체였다. 기둥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고, 그 표면에는 수억 개의 얼굴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것이 이 세계의 핵이자, 수많은 영혼을 가둔 감옥이었다.

그런데 기둥의 바로 앞, 수정 제단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있었다. 흑단으로 만들어진, 아주 낯익은 상자였다. 회귀하기 전, 내가 죽던 날 밤, 어머니의 서재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유품함.

「저건…!」

내가 경악하는 순간, 유품함이 스스로 열리며 그 안에서 새까만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긴 은발, 깊은 파란 눈, 그리고 황후의 위엄이 서린 드레스를 입은 여자.

어머니, 아델리아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알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유령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정교한 인형, 일종의 방어 프로그램처럼 보였다.

‘돌아가라.’

어머니의 형상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은 산 자가 머물 곳이 아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소멸될 것이다.’

“어머니…!”

카엘의 영혼이 내 옆에서 절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저것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형상을 보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리로는 저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지만,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저건 우리 기억을 읽고 시스템이 만들어낸 환영이야. 우리를 막기 위한 수호자인 셈이지. 속지 마.」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내 안의 ‘독’을 끌어올렸다. 공허의 힘이 내 유령 같은 손에 검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지금 저 가짜를 베고, 수정 기둥을 파괴해야만 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카엘이 다시 내 앞을 막아섰다. 그의 의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안 된다고 했소!」

「비켜! 저건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알아! 하지만 저것이 진짜든 가짜든, 저 형상을 내 손으로 해칠 수는 없어!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고 정화할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방법은 없어!」

우리의 의식이 부딪히는 순간, 어머니의 형상이 움직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우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잿빛 사막의 모래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수백 개의 모래 병사들을 만들어냈다. 병사들은 눈과 코, 입이 없는 기괴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기랄!」

카엘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의지를 형상화한 검을 만들어냈다. 검은 늑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흑철검이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쇄도하는 모래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하지만 병사들은 베어져도 금세 다시 모래로 뭉쳐 일어섰다.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나 역시 공허의 힘을 채찍처럼 휘둘러 병사들을 터뜨렸다. 하지만 병사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어, 결국 포기하게 만들려는 시스템의 수작이었다.

「카엘! 이렇게 싸워서는 끝이 없어! 내가 저 수호자를 맡을 테니, 넌 핵을 파괴할 방법을 찾아!」

「싫소! 당신 혼자 저것과 마주하게 둘 수 없어! 그리고 나는 파괴에 동의하지 않아!」

「이 고집불통! 그럼 다 같이 여기서 영원히 갇혀 있자는 말이야?」

「차라리 그게 낫겠소! 당신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보느니!」

그의 외침이 내 심장을 찔렀다. 그는 내가 ‘독’을 쓰는 것, 즉 내 영혼을 불태워 저주를 파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나를 살리고 싶어 했다. 이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나는 카엘을 지나쳐, 어머니의 형상을 향해 돌진했다. 모래 병사들이 나를 막아섰지만, 내 몸을 휘감은 공허의 오라에 닿는 순간 먼지처럼 소멸했다. 시스템의 하급 방어 체계는 내 ‘독’에 소용없었다.

마침내, 나는 어머니의 형상 앞에 섰다. 그녀의 텅 빈 파란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오른손에 모든 공허의 힘을 집중시켰다. 검은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갖추었다. 이 칼날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으면, 이 방어 시스템은 무력화될 터였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날을 쥔 손을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하구나… 나의 딸.’

환청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던, 어머니의 진짜 목소리였다. 그녀의 영혼 일부가 저 형상 안에 남아,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내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몸이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진짜 영혼이, 여기에?

그 찰나의 망설임.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어머니의 형상은 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내 가슴을 꿰뚫었다.

물리적인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내 영혼의 정수가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내 안에 있던 ‘독’의 힘이,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릴리아!」

카엘의 비명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흐려지며, 나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슬픈 얼굴 위로, 거대한 수정 기둥의 내부가 비쳐 보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수정 기둥 가장 깊은 곳, 그 중심부에 쇠사슬에 묶인 채 잠들어 있는 한 남자의 형상을.
내가 회귀 전 죽기 직전 보았던, 반역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던 바로 그 남자.
내 첫 번째 생을 앗아갔던 원수.

레오나의 오라버니이자, 전 황태자였던 알렉시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