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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제32화: 심장의 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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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감각.

어머니의 형상이 내 가슴에 꽂아 넣은 손은 물리적인 형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의지 그 자체. 내 존재의 근원을 붙잡고, 억지로 해체하려는 차가운 알고리즘이었다. 내 안에 들끓던 공허의 힘, 어머니가 심어놓은 ‘독’이 맥없이 풀려나가며 잿빛 사막의 대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기억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감정의 색이 바래고, 릴리아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던 모든 윤곽선이 희미해졌다.

죽음. 이것은 첫 번째 생에서 겪었던 육체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완벽한 소멸이었다.

「릴리아!」

카엘의 비명이 내 의식의 마지막 끈을 붙잡았다. 그의 영혼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어떻게든 흩어지는 나를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그는 미친 듯이 모래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이 무형의 소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연인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나를 꿰뚫은 어머니의 형상은 여전히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연극 같은 표정이 나를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포기해라. 이것이 너를 위한 나의 마지막 자비이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내면에서 울렸다. 저주를 파괴하려는 시도 자체가 시스템에 대한 반역. 그리고 반역자에겐 소멸이라는 형벌만이 주어진다. 그녀는 나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원한 고통의 감옥에 갇히기 전에, 차라리 무(無)로 돌려보내려는 뒤틀린 모정.

시야가 점멸했다. 카엘의 필사적인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거대한 푸른 수정 기둥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기둥의 심장부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잠들어 있는 알렉시스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아른거렸다. 왜? 어째서 네가 저기에. 내 모든 복수의 시작점이자 끝인 네가, 어째서 저주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거지? 의문은 해소되지 못한 채, 내 존재와 함께 스러져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당신을 놓지 않아.」

카엘의 단호한 의지가, 강철 쐐기처럼 내 소멸의 중심을 꿰뚫었다. 그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을 멈췄다.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자신의 투명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영혼의 절반을 가져가. 그것을 닻으로 삼아!」

「무슨…!」

「당신이 사라지면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 내 복수도, 내 부족의 명예도! 그러니 닥치고 붙잡아!」

그의 영혼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잿빛 사막을 환하게 밝히는, 북극의 오로라처럼 장엄하고 서러운 빛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연료로 삼아, 흩어지는 나를 다시 엮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마력의 공유가 아니었다. 기억과 감정, 생명력, 한 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을 나누는, 되돌릴 수 없는 계약이었다.

그의 빛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흩어지던 내 영혼의 파편들이 그 빛에 이끌려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소멸의 흐름이 멈췄다. 아니, 역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카엘이라는 단단한 닻에 묶여, 무(無)의 심연에서부터 강제로 끌어올려졌다.

그 대가는 끔찍했다. 나는 그의 영혼을 통해, 그의 가장 깊은 고통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자신 때문에 죽어간 부족민들의 얼굴. 어머니의 희생. 그리고 나를 잃을 뻔했던 방금 전의 그 처절한 공포까지.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다.

동시에, 내 안의 ‘독’ 역시 그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갔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허의 힘이 그의 존재에 섞여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원이자 독이 되었다.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잿빛 사막은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서러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지만, 대기 중에는 코끝을 에는 듯한 북부의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발밑의 얼음은 투명하여, 그 아래로 수많은 영혼들의 잔상이 물고기처럼 유영하는 것이 보였다. 잿빛 사막과 카엘의 기억 속 고향이 뒤섞여 만들어진, 새로운 심상세계였다.

우리의 형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찮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것은 여전히 생각의 파동에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영혼은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 대가로 그의 형체는 이전보다 조금 더 희미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깎아내어 나를 복원한 것이다. 그 사실에 심장이 시큰거렸다.

“바보 같은 짓을.”

“당신이야말로.”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안도와 함께, 지독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저 멀리, 호수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푸른 수정 기둥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형상은 사라져 있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서, 시스템이 우리를 더 이상 외부의 침입자로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더 강력한 방어 체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봤어.”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소멸하기 직전에. 저 수정 기둥 안에 누가 있는지.”

카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구였소?”

“알렉시스. 레오나의 오라버니. 나를 죽였던 반역자.”

그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었다. 그 역시 알렉시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제국을 뒤흔든 반역의 주모자. 하지만 그가 왜 여기에?

우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같은 의문을 품고,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걸어 수정 기둥을 향해 나아갔다. 발밑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잔상이 우리를 올려다보는 듯했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적의도 없었다. 그저 깊은 슬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기둥에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감도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수백 년 묵은 원념과, 뒤틀린 야망, 그리고 지독한 증오가 뒤섞인, 살아있는 저주 그 자체였다.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지가 바로 저 수정 기둥,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알렉시스였다.

“이해가 안 돼.”

카엘이 중얼거렸다.

“그는 반역자요. 제국의 정통성을 위협한 적. 그런 자를… 어째서 이 저주의 시스템이 자신의 핵으로 삼고 있는 거지? 마치…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호. 그 단어가 내 머릿속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렇다. 어머니의 형상은 나를 공격했다. 내 ‘독’이 알렉시스에게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시스템 전체가, 나의 원수인 그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역겹고 모순적인 상황인가.

마침내 우리는 수정 기둥 바로 앞에 도달했다. 거대한 빙벽과도 같은 기둥의 표면은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명한 벽 너머, 가장 깊은 중심부에서 잠들어 있는 알렉시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 오만하게 다물린 입술.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그 당당한 모습. 하지만 그의 몸은 굵은 마력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 사슬은 수정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기둥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지금의 저주를 더욱 강력하고 악랄하게 만드는 새로운 동력원이었다. 초대 황제의 순수했던 기억은, 알렉시스의 불타는 야망과 증오로 대체된 것이다.

“그는 죄수가 아니었어.”

나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제물이었던 거야.”

***

“제물이라니? 누가, 무엇을 위해?”

카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차가운 수정 벽을 짚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알렉시스의 기억 일부가 급류처럼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시스템의 일부가 된 우리의 영혼은, 이제 시스템의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보았다. 황태자 시절의 알렉시스를. 그는 누구보다 제국을 사랑했고, 자신의 동생 레오나를 아꼈다. 하지만 그는 황실의 어두운 비밀, ‘정원의 저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저주가 황족들을 미치게 하고, 제국을 안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것을 멈추려 했다.

그는 금지된 고대의 마법에 손을 댔다. 저주를 저주로 제압하기 위해.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는 저주를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저주의 폭주를 유발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영혼은 저주에 잠식당했다.

‘내가… 내가 황제가 되어야만 해. 이 썩어빠진 저주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의 순수했던 의지는, 저주에 의해 뒤틀린 광기가 되었다. 그가 일으킨 반역은 제국을 위한 혁명이 아니었다. 저주에 먹혀버린 한 남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황제였던 내 아버지는, 그를 죽이는 대신 이 탑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하여, 폭주하는 저주를 빨아들이는 새로운 ‘필터’로 삼아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켜 제국을 유지하려 했던 아버지의 냉혹한 선택. 그것이 내 첫 번째 생의 모든 비극을 낳은 진짜 원인이었다.

“젠장….”

나는 수정 벽에서 손을 떼며 비틀거렸다. 카엘이 재빨리 나를 부축했다. 그의 영혼을 통해, 그 역시 내가 본 것을 함께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알렉시스가 저주에 미쳤다는 것을. 그리고 그를… 산 제물로 삼아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을?”

“그래.”

내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막으려 했던 거겠지. 알렉시스를 봉인하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언젠가 그의 증오가 저주를 완전히 집어삼켜 더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을 예견했을 테니까. 그래서 어머니는 ‘독’을 만들었어. 이 모든 시스템을, 알렉시스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하지만 그 그림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절망적이어서,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정도였다.

우리가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침묵하고 있는 그때, 수정 기둥이 스스로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고막을 찢는 듯한 불협화음과 함께, 기둥 내부가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잠들어 있던 알렉시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직 순수한 증오와 파괴 충동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이, 이 심상세계의 지배자로서 완전히 각성한 것이다.

‘감히 나의 안식처를 더럽히는 버러지들이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그것은 천둥과도 같았고, 칼날과도 같았다.

“알렉시스!”

내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정신 차려! 넌 저주에 먹혔어! 넌 이 탑의 죄수일 뿐이야!”

‘죄수?’

그의 형상이 비웃었다. 수정 기둥 안에서, 그를 묶고 있던 쇠사슬들이 맥없이 풀어졌다. 그는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수정 벽은 더 이상 그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물속을 걷듯, 유유히 벽을 통과하여 우리 앞에 섰다.

‘나는 죄수가 아니다. 나는 이 정원의 새로운 왕이다. 너희의 나약한 신들이 실패한 곳에서, 나는 마침내 영생을 얻었노라.’

그의 몸에서는 검붉은 오라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힘은 어머니의 형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는 이 세계 그 자체였다.

“헛소리. 넌 그저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영원히 고통받는 것뿐이야.”

카엘이 내 앞을 막아서며, 다시 흑철검을 뽑아 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런 우리를 보며, 가엾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희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즐기고 있다. 이 제국에 흐르는 모든 증오와 절망을 먹으며, 나는 더욱 강해지고 있지.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이 껍데기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내가 이 제국의 진정한 신이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뒤틀린 집착과 광기가 번뜩였다.

‘아, 아델리아의 딸. 릴리아. 네 안에서 느껴지는구나.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너는 네 어미가 남긴 마지막 실패작이지. 하지만, 네게 기회를 주겠다.’

알렉시스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검붉은 저주의 힘이 매혹적으로 소용돌이쳤다.

‘나의 일부가 되어라, 릴리아. 그리고 너, 북쪽의 마지막 늑대. 너희의 그 하찮은 복수심과 희생 정신을 내게 바쳐라. 그리하면 우리가 함께 이 썩어빠진 제국을 집어삼킬 새로운 심장이 되어주지.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너희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게 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