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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방울이 차가운 수정 표면에 닿는 순간, 죽어 있던 공간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내 피를 먹고 깨어난 고대의 마법진이 푸른빛의 혈관처럼 수정 침대 전체로 뻗어나가며, 별의 요람 전체를 뒤흔드는 낮은 공명을 일으켰다. 바닥의 대리석이 진동하고, 천장의 별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금방이라도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듯 일렁였다.
“이런, 이런. 연극이 제 예상을 벗어나기 시작하는군요. 훨씬 더 재미있어지겠어.”
마르셀의 입가에 걸린 것은 당황이 아닌, 희열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격정적인 서곡을 감상하는 지휘자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이 모든 마력의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면 기드온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경계심으로 굳어 있었다.
“네년, 무슨 짓을!”
그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 모든 감각은 마법진을 통해 연결된, 저 너머의 존재에게로 쏠려 있었다. ‘근원의 실타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마력의 흐름을 가시화하여,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금지된 통찰의 마법이었다.
내 눈앞에, 세 개의 실타래가 나타났다.
하나는 내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차갑고 날카로운 은빛 실타래. 나의 영혼, ‘그림자’의 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정 침대 속 소녀에게서 피어오른, 따스하고 눈부신 금빛 실타래. ‘태양’의 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나는 숨을 삼켰다. 온몸의 피가 식는 소리가 들렸다. 금빛 실타래의 중심, 소녀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썩은 동아줄처럼 검붉은 기운을 내뿜는 세 번째 실타래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금빛 실타래에 깊이 뿌리내린 채, 그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는 명백한 ‘기생체’였다.
카엘과 마르셀. 둘 다 거짓말을 했다. 아니, 진실의 조각만을 보여주며 나를 기만했다. 이 아이는 단순히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쇠약해진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체불명의 저주에 잠식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솔데의 몸에 피어난 검은 장미는, 이 거대한 저주가 숙주의 생명력을 다 빨아먹고, 새로운 숙주를 찾아 세상 밖으로 흘러나온 첫 번째 포자(胞子)에 불과했다.
이 아이의 심장은 해독제가 아니다. 저주의 근원 그 자체였다.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이솔데를 살리는 방법이 아니라, 끔찍한 역병을 세상에 풀어놓는 방아쇠가 될 터였다.
“마법을 멈춰라! 황명이다!”
기드온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듯,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육중한 검이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자, 섬광과 함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나갔다.
“황명이라. 지금 당신이 지키려는 황태자가, 제국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괴물을 키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내가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손안에 숨겨두었던 철사를 단검처럼 고쳐 쥐었다. 저 거대한 갑옷을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무기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닥쳐라! 감히 전하를 모독하다니!”
기드온의 두 번째 공격이 쇄도했다. 나는 그의 힘을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육중한 갑옷은 강력한 방패인 동시에, 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족쇄였다. 나는 뱀처럼 그의 검 아래로 파고들어, 갑옷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무릎 뒤 관절을 철사 끝으로 후려쳤다.
“큭!”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의 자세가 순간 무너졌다. 나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수정 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지긋지긋한 인형극의 무대를, 내 손으로 부숴버리겠다.
“안 돼!”
기드온의 절박한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마력을 끌어모아, 철사에 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마법진의 심장부이자 세 개의 실타래가 얽혀 있는 수정 침대의 정중앙을 내리찍었다.
콰지직-!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얼어붙었던 거대한 빙하가 갈라지는 듯한,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굉음이 별의 요람 전체를 뒤흔들었다. 푸른빛을 발하던 마법진이 폭주하며, 수정 침대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틈으로 억눌려 있던 순수한 생명의 마력과 검붉은 저주의 마력이 뒤섞여,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천장의 별들이 빛을 잃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바닥이 꺼지고 벽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폭풍의 직격타를 맞고 종잇장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터져 나왔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크윽… 어리석은… 짓을….”
먼지 속에서 기드온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너지는 기둥 파편에 어깨를 맞아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내가 아니라 부서진 수정 침대 속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수정 침대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소녀는 마력 폭풍의 중심에서 기적처럼 상처 하나 없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만, 그녀를 감싸고 있던 기이한 생명력의 막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닌, 그저 숨이 멎어가고 있는 연약한 소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마르셀이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는 폭풍 속에서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무너지는 모든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훌륭하군요, 공주님. 판을 뒤엎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체스판 자체를 부숴버릴 줄이야. 이래서 제가 당신을 높이 사는 겁니다.”
그는 무너지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슬슬 퇴장할 시간입니다. 다음 막은 이곳보다 훨씬 더 넓은 무대에서 펼쳐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놈을… 어떻게 믿지?”
내가 피를 토하며 물었다.
그는 내 질문에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믿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용’하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겐 ‘황태자’라는 공동의 적이 생겼으니까요. 적의 적은, 가장 유용한 동료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은 궤변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는 대신, 벽을 짚고 스스로 일어섰다.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후들거렸다.
“안내나 해.”
그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가 벽에 새겨진 문양의 일부를 누르자, 무너지는 소음 속에서 또 다른 비밀 통로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진 기드온과, 숨이 멎어가는 내 반쪽을 돌아보았다. 기드온의 눈에는 나를 향한 살의와, 공주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결국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어두운 통로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별의 요람은 굉음과 함께 완전히 붕괴하며 스스로를 영원한 무덤 속에 봉인했다.
***
“젠장, 젠장! 무너지고 있어!”
이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어느새 그의 등에 업혀, 좁고 축축한 지하 수로를 달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마르셀의 안내를 받아 폐허가 된 연회장 지하의 비밀 수로에서 이안과 엘리안과 합류한 뒤였다.
“대장, 정신이 드십니까!”
엘리안이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카엘 경이 알려줬습니다. 황궁 지하가 무너지고 있으니, 이쪽으로 가면 당신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카엘. 그 이름에 다시 한번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르셀은 그저 그의 대리인에 불과했던 것일까.
우리는 위에서 쏟아지는 흙더미와 돌덩이를 피해 미친 듯이 달렸다. 이안의 등은 바위처럼 단단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와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저 멀리서 희미한 달빛과 함께, 지독한 하수구 냄새를 뚫고 신선한 밤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출구였다. 우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곳을 향해 달렸고, 마침내 수도 외곽의 버려진 수문 밖으로 굴러떨어지듯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빠져나오자마자, 등 뒤의 수로는 굉음과 함께 완전히 흙더미에 파묻혔다.
우리는 차가운 강가의 진흙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한참 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절망적인 현실이 다시 목을 졸라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황궁에 잠입해 얻은 것은 더 거대한 절망뿐이었고, 이솔데를 구할 방법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제 어떡하지….”
엘리안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너무나도 태평하고, 모든 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소리. 강둑 위, 달빛을 등지고 선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남색 연미복, 손에 들린 와인잔, 그리고 지독하게 아름다운 미소.
카엘이었다.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릴리아. 주연 배우가 무대 장치까지 박살 내 버릴 줄은 몰랐거든.”
그의 목소리는 유쾌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겪은 사투를,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 개자식…!”
이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부상당한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다. 그는 비틀거리다,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이안을 부축하며, 카엘을 노려보았다. 내 눈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배신감이나 증오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무감정한, 거래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만이 존재했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였나? 황궁을 혼란에 빠뜨리고, 아서의 계획을 망쳐놓는 것?”
“그건 전채 요리일 뿐이지.”
카엘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선택’하는 것을 보고 싶었어. 그림자로 남을 것인지, 태양이 될 것인지. 그런데 넌 내 예상을 뛰어넘어, 둘 다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더군.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길을.”
그는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구둣발이 진흙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덕분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 ‘밤의 가시’라고 불리는 고대의 기생 저주. 황실의 핏줄, 그것도 가장 순수한 생명의 마력을 가진 자에게만 기생하는 아주 까다로운 녀석이야.”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별의 요람에서 마주했던 진실까지도.
“네가 그녀의 심장이 해독제라고 했지. 거짓말이었어.”
내가 쏘아붙였다.
“거짓말이라니. 상처받는걸.”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버전으로 요약해준 것뿐이야. 복잡한 진실보다는, 단순한 목표가 사람을 더 잘 움직이게 하는 법이거든. 어쨌든, 네 덕분에 이제 진짜 해독제를 찾을 길이 열렸어.”
그의 말에, 나와 이안, 엘리안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꽂혔다.
“‘밤의 가시’는 숙주의 생명력을 먹고 자라. 하지만 유일하게 먹지 못하는 게 있지. 그건 바로 자신의 근원이 되는 힘, 죽음의 마력이다.”
카엘은 달빛을 받아 자수정처럼 빛나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주를 잘라내려면, 그에 걸맞은 칼이 필요한 법. 우리는 고대의 유물을 찾아야 해. 죽음의 마력이 응축된 유일한 결정체. ‘황혼의 눈물’을.”
황혼의 눈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불길한 기운만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게… 어디에 있지?”
이안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카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사냥감을 함정으로 유인하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제국에서 가장 깊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죽음에 가까운 곳.”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우리에게 절망적인 선고를 내리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초대 황제의 무덤, ‘태양의 영면실’에 잠들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