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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 점으로 응축되어 내 고막을 짓이기는 듯했다.
이안의 흔들리는 눈동자. 그 안에는 나를 향한 원망도,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이기심도 없었다. 그저 함께 지옥의 강을 건너온 동료가 감당해야 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지독한 고통과 슬픔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칼보다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렀다. 그의 침묵은 천 마디의 절규보다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카엘. 이 악마 같은 남자는 단순히 거래를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시험하고, 이안과의 유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가장 잔인한 선택지를 던졌다. 내 손으로 나의 과거를 죽여, 동료의 미래를 구하라고. 어떤 선택을 하든, 내 영혼은 부서져 내릴 터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고, 형태 없는, 밟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 아서의 말이, 카엘의 제안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진짜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한 대체품, 누군가를 위한 도구, 누군가를 위한… 해독제다.
“끌고 가라.”
기드온의 차가운 명령이 얼어붙은 공기를 갈랐다. 은빛 기사 두 명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거친 손이 내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내 목소리는 쇠를 긁는 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 기사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나는 그들을 밀치고,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나는 똑바로 서서, 지옥의 문지기 기드온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 걸음은 더 이상 도망자의 것이 아니었다. 사형대로 향하는 죄인의 것이었다.
“릴리아!”
이안이 피 끓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보면, 애써 쌓아 올린 얼음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카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진한 와인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중독시키는 것 같았다. 그와 내 어깨가 부딪히기 직전, 나는 오직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짠 판 위에서 춤춰주지. 하지만 명심해. 마지막 곡은 내가 고를 테니.”
내 귓가에서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만족스러운, 그리고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오만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기드온이 열어놓은 비밀 통로의 어둠 속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이안의 절망적인 시선과, 카엘의 흥미로운 시선이 비수처럼 박혀왔다. 차가운 어둠이 나를 삼키는 순간, 연회장의 문이 닫히며 모든 빛이 사라졌다. 그곳에서, 나는 홀로 심장의 무게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
황궁의 비밀 통로는 거대한 짐승의 내장처럼 길고 축축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울리며, 죽음을 향한 행진곡처럼 들렸다. 횃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며, 내 과거의 망령들을 벽 위에 그려냈다.
기드온과 그의 기사들은 내 앞뒤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걸었다. 그들의 육중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이 침묵의 동굴 속 유일한 소음이었다. 나는 손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철사의 감촉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수백 개의 경우의 수를 그렸다.
카엘은 왜 내게 탈출할 도구를 줬을까. 정말로 내가 태양을 삼키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그저 더 큰 혼돈을 위한 장작으로 던져 넣는 것일까. 그는 황태자를 배신하는 동시에, 나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양쪽에 모두 칼을 들이밀고,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쪽에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도박꾼의 수법이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기드온이 거대한 강철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에는 고대어로 된 봉인 마법진이 푸른빛을 희미하게 발하고 있었다. 그가 문에 손을 대자, 마법진이 그의 마력에 반응하며 소리 없이 안쪽으로 열렸다.
문 너머에서 불어온 공기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차갑다 못해 살을 에는 듯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마치 겨울 숲 가장 깊은 곳, 첫눈이 내린 새벽의 공기 같았다.
“여기가 ‘별의 요람’이다.”
기드온이 낮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경외심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그곳은 감옥이나 무덤이 아니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은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수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며 은은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바닥은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천장의 별빛을 그대로 반사해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방 한가운데, 제단처럼 받들어진 투명한 수정 침대 위에, 한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나의 얼굴을 한 소녀.
나는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 쿵, 울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잠옷, 창백한 뺨, 가지런히 모은 두 손. 평화롭게 잠든 숲속의 공주님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무력하고, 너무나도 순수해 보이는 존재.
이 아이를… 죽이라고. 이 아이의 심장을 꺼내, 이솔데를 살리라고. 카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이안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수정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가, 그 투명한 벽 너머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 하지만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간직한 얼굴. 고통도, 분노도, 복수심도 모르는, 오직 평온만이 깃든 얼굴이었다.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 평온하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잠이 아니었다.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 어떤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숨을 쉬고는 있는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녀의 가슴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주,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살아는 있었다. 하지만 그 생명력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수정 침대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에게는, 저주를 대신 받아낼 그림자가 필요했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기드온이 아니었다. 좀 더 가볍고, 유려하며, 모든 것을 장난처럼 여기는 듯한 목소리.
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어둠이 가장 깊게 드리워진 방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박수를 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르셀이었다.
“아주 감동적인 가족 상봉이군요, 공주님.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둘 다 공주님인가?”
그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기드온은 마치 그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유령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에….”
“연극의 가장 중요한 장면에, 연출가가 빠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르셀은 잠든 소녀를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비극이야. 태양으로 태어났지만, 제 빛을 감당하지 못해 서서히 죽어가는 공주. 그리고 그 아이의 모든 고통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태어난 그림자. 어미라는 작자는 제 딸을 살리겠다고 또 다른 딸을 제물로 바친 셈이지. 황실의 사랑이란, 언제나 이렇게나 이기적이라니까.”
그의 말에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섬광처럼 맞춰졌다.
어머니의 일기장. ‘재앙’. ‘내 빛을 감당하지 못할 아이’. 그 모든 것은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바로 이 아이, 진짜 카일루스를 향한 말이었던 것이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도 강력한 마력을 지녔지만, 그 육체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금지된 마법으로 ‘그릇’을 나눈 것이다. 힘과 영광을 담을 태양, 그리고 그 힘의 부작용인 모든 저주와 고통을 받아낼 그림자로.
내가 겪었던 모든 불행, 나를 옭아맸던 모든 비극은,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한 대가에 불과했다. 나는 처음부터 제물이었다.
“아서는 이 아이를 살리고 싶은 거겠지. 그래서 그림자인 네가 필요했던 거고.”
내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겁니다.”
마르셀이 내 말을 정정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소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잘 보시죠, 공주님. 저 흉터.”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제야 발견했다. 잠든 소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아있는 검은 넝쿨 모양의 반점.
‘온몸에 검은 장미 넝쿨 같은 반점이 피어나고 있다고….’
엘리안이 전했던 이솔데의 증상과 똑같았다.
“설마….”
“빙고. ‘가시 돋친 입맞춤’의 저주는, 본래 이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황태자는 반대파 귀족의 딸인 이솔데를 실험체 삼아 저주를 시험했고, 그 효과를 확인한 거죠. 그는 저주를 이용해 이 아이의 영혼을 잠식시킨 뒤, 그림자인 당신의 육체에 그 영혼을 온전히 옮겨 담을 생각인 겁니다. 완벽한 힘과,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를 모두 손에 넣는 것. 그것이 황태자 아서의 진짜 목적이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솔데는 그저 실험용 쥐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완성된 영혼을 담아낼 빈 껍데기였다.
카엘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황태자는 네 목숨을 원하지 않아. 그는… 그림자가 살아서 자신에게 돌아오길 원하더군. 아주 간절하게.’
이 모든 것이 거대한 그림이었다. 황태자의 탐욕, 교단의 저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카엘과 마르셀. 나는 그 거대한 판 위에서 가장 중요한 말인 동시에, 가장 가혹한 운명을 짊어진 희생양이었다.
***
“이제 선택의 시간입니다, 릴리아.”
마르셀의 목소리가 달콤한 독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대로 황태자의 장기 말이 되어, 당신의 몸을 빼앗기고 존재 자체가 소멸될 것인가? 아니면….”
그는 내 손에 들려있던, 카엘이 건넨 가느다란 철사를 힐끗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끝낼 기회를 잡을 것인가.”
그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내 영혼을 뒤흔드는 마지막 제안을 속삭였다.
“이 아이를 죽이면, 이솔데 양은 살릴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영원히 반쪽짜리 그림자로 남게 될 겁니다. 황태자의 다음 목표가 되어서 말이죠. 하지만… 이 아이를 죽이는 대신, 그 아이와 ‘하나’가 되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소리지?”
“마법 결속은 영혼을 나누는 마법. 그렇다면, 그 영혼을 다시 합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태양과 그림자가 만나,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이 아이는 당신의 강인한 육체를 통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한쪽의 자아는 사라지게 되겠지만… 과연 어느 쪽이 살아남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의 제안은 카엘의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훨씬 더 매혹적인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나의 과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싸워 이겨 그것을 집어삼키라는 것. 그리하여 반쪽짜리 그림자가 아닌, 완전한 태양이 되라는 것.
하지만 그 대가는 명확했다. 이솔데의 목숨. 완전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안의 동생을 버려야만 했다.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공주님. 황태자는 이미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곧 그의 친위대가 들이닥치겠죠. 선택하시죠. 해독제를 택해 도망자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완전한 힘을 되찾고 새로운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수정 침대 속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마르셀과, 문을 지키는 기드온을 보았다.
기드온은 왜 마르셀의 등장을 방관하고 있는가. 마르셀은 황태자의 사람인가, 카엘의 사람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람인가. 이 미친 연극의 진짜 연출가는 대체 누구인가.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차가운 진실 하나.
‘카엘은 이 아이의 심장이 해독제라고 했어. 하지만 마르셀은 저주가 이 아이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했지.’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혹은 둘 다 진실의 일부만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손안의 철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선택지는 두 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나는 수정 침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르셀과 기드온이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시작했다. 나는 철사를 이용해 내 목숨을 구할 열쇠를 따는 대신, 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그 피 묻은 손가락으로, 수정 침대의 표면에 복잡한 고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괴’나 ‘결합’의 마법진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내게 몰래 가르쳐주었던, 모든 마법의 흐름을 역으로 추적하는 ‘근원의 실타래’ 마법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