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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잔 속 붉은 액체가 내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을 비웃듯 담아내고 있었다.
“어서 와, 릴리아.”
카엘의 목소리는 독이 든 꿀처럼 달콤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환영. 지옥으로의 초대였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은빛 갑옷의 물결, 공포에 질린 귀족들의 비명,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듯 우아하게 서 있는 남자.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연극 무대였고, 나는 어릿광대의 역할을 떠맡은 주연이었다.
“네 진짜 가치를 증명할 무대에 선 것을, 환영하지.”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남은 잿더미 같은, 차갑고 텅 빈 공허. 나는 그 공허함 속에서 단 하나의 명료한 생각을 건져 올렸다.
죽인다.
“이 개자식!”
이안의 포효가 정적을 찢었다. 그는 굶주린 늑대처럼 바닥을 박차고 카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앞을 서너 개의 은빛 창날이 가로막았다. 챙, 챙그렁!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창을 쳐냈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기사들의 파도에 그의 움직임은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안, 샹들리에!”
내 외침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안은 내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는 내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칼날을 몸으로 받아낼 기세로 돌진하며, 기사 한 명의 방패를 빼앗아 디딤돌 삼아 벽을 탔다. 그리고 샹들리에를 지탱하는 거대한 사슬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콰앙!
비명 같은 쇠 울음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샹들리에가 균형을 잃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귀족들의 패닉에 찬 비명이 절정에 달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과일 나이프를 발끝으로 걷어 올려 낚아챈 뒤, 테이블보를 찢어내 카엘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그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목표는 그의 목에 박힌, 오만하게 율동하는 경동맥.
하지만 내 칼끝이 그의 살갗에 닿기 직전, 그의 몸이 안개처럼 옆으로 스르르 비껴섰다. 동시에 내 손목에 뱀이 휘감기는 듯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는 카엘이, 내 손목을 부러뜨릴 듯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성급하긴. 연극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주연 배우가 무대 뒤에서 칼을 빼 들면 쓰나.”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서 진한 와인 향이 풍겨왔다. 역겨웠다. 나는 붙잡힌 팔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강철 같은 힘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 순간, 추락한 샹들리에의 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광경에 나는 숨을 멈췄다. 은빛 기사들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그들은 추락 지점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충격이 닿기 전에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안만이 부서진 수정 파편 더미 속에서,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무대인가?”
내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끓어오르는 살의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래. 네가 황궁에서 벌였던 어설픈 소꿉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무대지.”
카엘은 나를 놓아주는 대신, 나를 자신의 몸 뒤로 숨기듯 끌어당겼다. 그리고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모두 물러나라. 손님께 실례가 되지 않도록.”
그의 명령에 기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거두고, 연회장의 벽을 따라 도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포에 질려 구석에 몰려 있던 귀족들은 영문을 모른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는 그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는 나를 죽이거나, 황태자에게 넘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카엘?”
이안이 피 흘리는 어깨를 움켜쥔 채, 경계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카엘을 향한 불신과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카엘은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거래에는 언제나 검수 과정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지, 늑대 나리. 내가 팔려는 물건이 정말로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구매자 앞에서 직접 증명해 보여야 하지 않겠나?”
“물건? 릴리아가 네놈의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니, 당치도 않지.”
카엘은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조롱이나 기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하기 힘든 보석을 들여다보는 감정사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의 빛이 번뜩였다.
“이쪽은 제국의 운명을 통째로 뒤바꿀 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다.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물건이지. 그러니,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내가 직접 확인해야만 했어. 이 열쇠가 녹슨 고철 덩어리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인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회장의 비밀 문 중 하나가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아서의 충견, 진홍의 사자단장 기드온이었다. 그의 등장에 겁에 질린 귀족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약속대로, ‘그림자’는 확보되었나, 은빛 공작?”
기드온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딱딱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벌레 보듯 훑고 지나갔다.
카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아주 팔팔한 상태로 잘 모셔두었지. 다만, 생각보다 값이 좀 나가는 물건이라 말이야. 황태자 전하께서 약속하신 보상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네놈…!”
이안이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내가 팔을 뻗어 막았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나설 때가 아니었다. 나는 카엘과 기드온,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이 미친 상황의 판도를 읽어야만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다. 네가 원하는 대로, 서부 교역로의 독점권을 넘겨주시겠다고 했다.”
“그깟 교역로 하나로는 어림없지.”
카엘은 콧방귀를 뀌며, 기드온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오직 그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나에게는 똑똑히 들리도록 속삭였다.
“나는… 황태자 전하의 ‘진짜 심장’에 대한 정보를 원해. 태양을 품은 그릇, 금지된 마법 결속으로 태어난 또 다른 공주.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기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과 살기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황실 최고의 기밀. 아서가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는 비밀을, 이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놈이 알아야 할 바가 아니다.”
“모르는 소리. 내가 팔려는 물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안이거든. 이 그림자는 그 태양 없이는 존재 가치가 없는 반쪽짜리 물건 아닌가? 상품의 정확한 정보를 아는 것은, 판매자의 당연한 권리다.”
카엘의 말은 나를 향한 조롱인 동시에, 기드온을 향한 협박이었다. 그는 아서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그것을 이용해 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남자는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판을 처음부터 설계하고, 황태자마저 자신의 장기 말로 이용하려는 거대한 야심가였다.
기드온은 한참 동안 카엘을 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계산이 오가고 있을 터였다. 마침내,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별의 요람’에 있다.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정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이 거래는 깨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전하게.”
카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기드온과 나, 그리고 이안을 번갈아 보며, 마치 경매의 마지막 낙찰을 알리는 경매사처럼 선언했다.
“자, 검수 과정은 끝났으니, 이제 본 거래를 시작해 볼까.”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시지, 릴리아. 네가 앞으로 머무를, 아주 아늑한 새장을 보여줄 테니.”
그가 가리킨 곳은 기드온이 나타났던, 어둠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였다. 그곳은 황태자에게로 이어지는 길. 나의 사형대였다.
***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함정의 한가운데였지만,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시선은 카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꾸미는 진짜 속셈은 무엇인가. 그의 진짜 목표는 무엇인가.
“왜지?”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왜 이딴 미친 연극을 벌이는 거지? 네가 원하는 게 정말 돈과 정보뿐인가?”
카엘은 내 질문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물론 아니지. 돈과 정보는 그저 수단일 뿐이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훨씬 더 재미있는 거거든.”
그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기드온과 이안이 동시에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가 나를 빨아들일 듯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지루한 제국을 통째로 뒤엎고 싶어. 썩어빠진 황족들, 탐욕스러운 귀족들, 위선적인 교단까지.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판을 짜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로는 부족해. 이 거대한 체스판을 뒤엎으려면, 규칙을 무시하고 왕을 직접 물어 죽일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말’이 필요하거든.”
그의 눈이 섬뜩한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찾던 완벽한 ‘말’이야, 릴리아. 태양을 삼킬 수 있는 유일한 그림자.”
그는 내 손에 작은 금속 조각 하나를 몰래 쥐여주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 자물쇠를 딸 수 있는 가느다란 철사였다.
“기드온이 너를 ‘별의 요람’으로 데려갈 거다. 그곳에서 너는 네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되겠지. 그리고 선택해야 할 거야. 영원히 그림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태양을 집어삼키고 새로운 태양이 될 것인지.”
그의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그는 나를 황태자에게 파는 셔를 하며, 실은 나를 황실의 가장 깊은 심장부로 직접 들여보내려는 것이었다. 가장 안전한 감옥이, 가장 위험한 침투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솔데의 저주는 어떡하지?”
이안이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간절함이, 잠시 내 이성을 되돌려 놓았다.
카엘은 이안을 돌아보며, 연민과 조소가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 ‘가시 돋친 입맞춤’. 황혼의 교단이 만든 아주 지독한 예술품이지. 안타깝지만,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해독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이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흔들렸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 아니야. 그건 본래 풀 수 없도록 만들어진 저주거든.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카엘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저주는 또 다른 저주로 풀리는 법. ‘가시 돋친 입맞춤’은 생명의 마력을 가진 자의 피를 제물로 삼아 피어나는 어둠의 꽃이다. 그 저주를 멈추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보다 더 강력하고 순수한 생명의 마력을 가진 존재의 심장을 바치는 것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를 실었다.
“네 진짜 몸, ‘별의 요람’에서 잠들어 있는 그 아이 말이야. 그 아이의 심장이, 네 동료의 동생을 살릴 유일한 해독제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이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의 시선에는 혼란과 고뇌, 그리고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애원이 담겨 있었다.
나의 얼굴을 한, 아무 죄 없는 소녀. 내 존재의 근원이자, 내 복수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수수께끼. 그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이라고.
그것이 이 남자가 내게 제안하는, 악마의 거래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