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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제20화: 은빛 공작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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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엘.

그 두 글자가 내 세상의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뜨렸다. 황태자 아서의 잔인한 진실이 내 존재를 발밑부터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면, 그 이름은 산산조각 난 내 영혼의 파편마저 짓밟아 가루로 만드는 확인사살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것은 오직 내 심장이 부서지는 굉음뿐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엘리안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멀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전언이 몰고 온 파멸적인 침묵에 질식할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이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개자식이… 처음부터 우릴 갖고 놀았던 거야.”

침묵을 깬 것은 이안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숫돌에 갈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섬뜩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것조차 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붕대를 짓이기듯 움켜쥐었다. 손등에 솟아난 힘줄이 그의 살갗을 찢고 터져 나올 것처럼 팽팽했다.

“그놈의 능청스러운 낯짝, 그 가증스러운 미소! 그 모든 게 연극이었어! 우리가 황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그 새끼는 우리 목에 걸린 현상금을 세고 있었던 거라고!”

그의 분노는 들불처럼 타올랐다. 폐신전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열기에 데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배신감이라는 감정조차 사치였다. 그저 텅 비어버린 공허함이, 얼음처럼 차가운 무력감이 내 몸의 모든 피를 대신해 흐르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소리 없는 비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그림자. 그래, 나는 그림자였다.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내게 마음을 내어준 듯한 착각을 심어준 남자. 내 부서진 조각을 알아봐 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흔들었던 남자. 그 모든 것이, 값을 더 쳐 받기 위한 상인의 수완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가장 값비싼 상품이었을 뿐이다.

“아닐 겁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카엘 경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엘리안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확신조차 얻지 못하고 모기 소리처럼 잦아들었다. 우리 모두 보았다.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보력, 신분을 넘나드는 자유로움,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여유. 그는 처음부터 이 판의 모든 것을 알고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찾아내.”

마침내 내 입이 떨어졌다. 얼어붙었던 혀가 간신히 녹아내려,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단어를 뱉어냈다.

“그놈을 찾아내. 지금 당장.”

“릴리아, 지금 네 상태로는….”

이안이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내 눈빛을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내 눈에는 슬픔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빛이 사라진, 칠흑 같은 심연만이 존재했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내 귀로 직접 들어야겠어. 내 손으로… 그 심장을 뽑아내기 전에.”

내 목소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잔잔했다. 모든 감정이 불타버리고 남은 재처럼, 그저 차갑고 고요했다. 하지만 이안과 엘리안은 그 고요함이 천 번의 절규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끝장내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

수도 아르케디아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황태자를 향한 반란의 불씨가 타올랐던 북부 구역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잿빛으로 죽어 있었지만, 귀족들이 거주하는 중앙 구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화려한 불빛과 거짓된 웃음으로 가득했다. 세상은 언제나 강한 자들의 편이었다.

엘리안의 정보력은 이런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반나절 만에 카엘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물어왔다.

“‘은빛 공작’이라는 곳입니다. 수도에서 가장 은밀하고, 가장 호화로운 사교 클럽이죠. 왕족이나 대귀족이 아니면 이름조차 들을 수 없는 곳입니다. 카엘 경은 그곳의 주인이자, 가장 중요한 손님들을 상대하는 정보 브로커라고 합니다.”

엘리안은 낡은 탁자 위에 수도의 지도를 펼치고, 중앙 구역의 가장 화려한 거리 한복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내뱉는 정보 하나하나가, 카엘이라는 남자의 정체를 더욱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주인이라고? 일개 정보상이 어떻게 그런 곳을….”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곳은 단순한 사교 클럽이 아닙니다. 제국의 모든 비밀과 욕망이 거래되는 진짜 ‘밤의 시장’입니다. 붉은 손 자카르의 시장 따위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 만큼 거대한 곳이죠. 그곳의 주인이라는 건, 그가 제국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다는 뜻입니다.”

나는 말없이 지도 위에 찍힌 점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냉철한 계산이 채우기 시작했다.

“경비는?”

“삼엄합니다. 입구에서부터 신원과 마력을 모두 확인합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습니다.”

“초대장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네. 설사 구한다 해도, 우리 얼굴은 이미 황궁의 수배서에 올랐을 겁니다.”

이안은 답답한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럼 어쩌지? 정문으로 쳐들어가서 다 엎어버릴까?”

“아니.”

내가 그의 무모한 말을 잘랐다.

“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분노에 차서 제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오기를. 그렇다면, 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가야지.”

나는 구석에 놓여 있던, 우리가 황궁에 잠입할 때 썼던 낡은 시종의 옷가지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화려한 무도회에는, 가장 초라한 손님이 눈에 띄지 않는 법이야.”

***

‘은빛 공작’의 후문은 그 화려한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독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골목에 숨어 있었다. 나와 이안은 지난밤 엘리안이 훔쳐 온, 낡고 해진 주방 하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 얼굴에는 검댕을 칠했고, 이안은 일부러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여 어수룩한 짐꾼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엘리안은 반대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내가 직접 마주해야 할 진실이었다. 이안은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없이 내 그림자가 되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나르는 다른 하인들 틈에 섞여,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대한 주방은 전쟁터처럼 분주했다. 수십 명의 요리사와 하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오갔고, 지글거리는 고기 냄새와 톡 쏘는 향신료 냄새,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홀로는 어떻게 나가지?”

이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주방에서 연회장으로 나가는 모든 문은 육중한 체구의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갓 구운 빵을 가득 실은 거대한 수레를 발견했다.

“저걸 민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주방 보조는, 이안의 험악한 인상과 마주치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 수레를 밀며, 경비들이 지키는 문으로 향했다.

“잠깐. 신분패를 보여줘.”

경비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안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보다 먼저, 이안의 발을 세게 밟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비굴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방장님이 급히 연회장으로 옮기라고 하셔서… 신분패는 저희 조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경비는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았지만, 갓 구운 빵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한 냄새와 우리의 누추한 행색, 그리고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재촉의 종소리에 이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잇, 재수 없는 놈들. 썩 꺼져!”

우리는 고개를 조아리며, 무사히 문을 통과했다.

주방의 혼돈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이 사방의 금빛 장식에 부딪혀 눈을 멀게 할 듯한 빛을 뿜어냈다. 코를 찌르는 값비싼 향수와 잘 익은 과실주 향기,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나른한 현악기 연주, 그리고 귀족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지옥의 바로 옆에 이런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우리는 벽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며, 빵 수레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인처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그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홀 안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장 빛나는 곳에 있었다.

연회장의 가장 중앙, 작은 분수가 흐르는 테라스에서, 그는 와인잔을 든 채 몇몇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아한 남색 벨벳 연미복, 여유롭게 휜 눈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자수정 빛 눈동자.

카엘.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내 안의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잇몸에서 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나는 빈 쟁반 하나를 들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롱하듯 건넸던 위로, 무심한 척 건네주던 상처약, 그리고 절망 속에서 내 손을 잡아주던 온기. 그 모든 것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내 심장을 헤집었다.

마침내 내가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또 다른 하인 중 하나로 여길 뿐이었다. 그는 내게서 빈 잔을 가져가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나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잠깐.”

내가 그를 붙잡았다. 내 목소리는 검댕과 위선으로 위장했지만, 그 안의 칼날은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는 거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차갑고 오만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서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주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행방을 아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주인 나리?”

내 말에,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우아한 미소가 처음으로 옅어졌다.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만 가지 감정과 계산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주변의 귀족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다시 예의 그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건이라. 글쎄, 이 몸은 워낙 많은 것을 사고파는 사람이라. 그 물건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라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은 없어, 아가씨. 모든 것엔 대체품이 있고, 모든 것엔 가격표가 붙어 있는 법이지. 중요한 건, 그 물건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만나느냐, 아니면 헐값에 팔려나가 버려지느냐, 그 차이일 뿐이야.”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대체품. 그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나는 손짓으로 막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의 거리는 이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나는 오직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내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긁어모아 물었다.

“왜 그랬지?”

질문이 아니었다. 절규에 가까운 애원이었다.

카엘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지나쳐 분수대 난간에 기대섰다. 그는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며, 그 안에 담긴 붉은 액체가 그리는 작은 소용돌이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세상에 오직 그와 나, 단둘만 남은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한 음악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뱀의 독처럼 차가웠다.

“상인은 언제나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구매자에게 물건을 파는 법이야. 그리고 이번 구매자는…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거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완벽한 무(無)의 공간만이 존재했다.

“황태자는 네 목숨을 원하지 않아. 그는… ‘그림자’가 살아서 자신에게 돌아오길 원하더군. 아주 간절하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회장의 모든 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닫혔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우아한 현악기 연주가 멎고, 사방의 샹들리에 불빛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화려한 연회장은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다. 비명을 지르며 혼란에 빠진 귀족들 사이로, 은빛 갑옷을 입은 ‘은빛 공작’의 사설 기사들이 칼을 뽑아 든 채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함정이었다. 그는 내가 찾아올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서 와, 릴리아.”

카엘이 와인잔을 들어 내게 건배를 청하며, 지독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네 진짜 가치를 증명할 무대에 선 것을, 환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