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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제19화: 두 개의 태양, 하나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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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수가 얼어붙는다는 건 이런 감각일까.

내 눈앞에서, 나의 얼굴을 한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 굳게 닫힌 눈꺼풀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운 풍성한 속눈썹까지. 그것은 내가 5년 전, 거울 속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던, 아직 세상의 더러움을 알지 못했던 황녀 카일루스의 얼굴이었다.

온몸의 피가 식다 못해 증발해 버리는 것 같았다. 발밑이 꺼지고, 내가 서 있던 세상 전체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재앙’이라는 단어가 독사의 형상으로 되살아나, 내 심장을 칭칭 감고 조여왔다.

저 아이가 진짜 ‘카일루스’라면.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

“아름답지 않나, 누이?”

아서의 목소리가 기름을 붓는 불길처럼, 내 머릿속을 태우며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희열이 가득했다. 그는 내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감상하는 오페라 관객처럼, 우아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걸작이지. 금지된 ‘마법 결속’으로 탄생한 완벽한 그릇. 제국의 힘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진정한 태양. 그리고… 그 태양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저주와 불행을 대신 짊어질 그림자.”

그림자.

내가 용병으로 살며 스스로에게 붙였던 이름.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말인가.

“네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안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법진의 충격으로 온몸이 마비된 듯 떨렸지만, 그의 눈만은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아서를 향한 증오로 이글거렸다. 기드온의 칼끝이 그런 그의 목을 가차 없이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라, 벌레 같은 놈.”

“내 복수는… 내 어머니의 복수는…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갈라지고, 부서진 쇳소리.

아서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 아니, 그건 누구보다 진실된 복수였지. 그림자가 감히 태양을 꿈꾼 죄. 네 존재 자체가 어머니의 수치이자, 황실의 오점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널 두려워했고, 나는… 그저 어머니의 뒷정리를 해드린 것뿐이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존재의 근간을 난도질했다. 나를 지탱해 온 모든 것,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복수라는 기둥이 뿌리째 뽑혀 먼지처럼 흩어졌다. 나는 누구를 위해 싸워왔나. 무엇을 위해 피를 묻혔나. 결국, 나는 내 존재를 부정당하기 위해 이 지옥까지 기어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황궁 전체를 뒤흔드는, 낮고 장중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해진 시각을 알리는 타종이 아니었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수도의 심장을 꿰뚫는 경종이었다.

아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소리지?”

기드온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창밖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수도의 북쪽 성벽 부근에서 붉은 화염이 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사방에서 병사들의 다급한 고함 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르셀.

그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화려한 조명도 필요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줄 바람잡이도 있어야 제맛 아니겠어요?’ 그가 던졌던 불씨가, 정확히 우리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불길이 되어 수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젠장! 반란군 놈들인가!”

기드온이 이를 갈며 외쳤다. 아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의 완벽한 연극이 예상치 못한 난입으로 엉망이 된 것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기드온! 당장 동궁의 병력을 이끌고 상황을 정리해! 이 쥐새끼들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하지만 전하!”

“명령이다!”

기드온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검을 고쳐 쥐고 방을 뛰쳐나갔다. 그의 육중한 갑옷 소리가 멀어졌다. 이제 이 방에 남은 적은 아서와 자카르, 그리고 문밖을 지키는 소수의 경비병뿐이었다.

기회는 번개처럼 찾아왔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 정신을 옭아매던 절망의 사슬을 끊어낸 것은, 이안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였다. 내가 누구이든, 내 과거가 무엇이든, 지금 내 눈앞에는 함께 지옥을 건너기로 맹세한 동료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다시 검을 쥘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아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가 그저 무너진 줄로만 알았던 아서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직도 발버둥을 치는군, 그림자 따위가!”

그가 허리춤에서 화려한 장식의 검을 뽑아 들었다. 황실 검술. 우아하고 기품 있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그의 검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대신, 물 흐르듯 몸을 비틀어 그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내 단검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파고드는 찰나, 옆에서 비릿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딜!”

자카르의 붉은 강철 의수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며 그의 공격을 피했다.

“이안, 일어나!”

내가 외치는 동안, 이안은 이를 악물고 마법진의 고통을 버텨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마법진의 중심에 새겨진 마력석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마력석이 깨지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푸른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비에서 풀려난 이안이 포효하며 자카르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혼란과 외부의 소란으로, 방 안의 전세는 순식간에 뒤엉켰다.

나는 다시 아서를 향했다.

“네 진짜 심장이라 했나? 그렇다면, 그 심장이 멈추는 광경도 아주 볼만하겠군.”

내 목소리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카일루스 황녀가 아니었다. 나는 용병 그림자. 살아남기 위해,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였다.

우리의 검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황궁의 비상 경종과 수도의 비명 소리가 우리의 교전을 위한 반주가 되었다.

***

“젠장, 젠장! 이쪽이다!”

이안이 내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그의 다리는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않아, 걸음이 위태로웠다. 우리는 쏟아지는 화살과 창을 피해, 미로 같은 황궁의 복도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아서는 생각보다 훨씬 약했고, 자카르는 이안의 야수 같은 공격에 밀려 퇴로를 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의 탈출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황궁 전체가 벌집을 쑤신 듯 들끓고 있었다.

“기도실로는 돌아갈 수 없어! 이미 병력이 깔렸을 거다!”

“그럼 어디로!”

우리는 막다른 길에 몰렸다. 등 뒤에서는 수십 명의 발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우리 앞의 복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태피스트리 뒤에서, 누군가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엘리안.

그는 초조한 얼굴로 우리를 재촉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태피스트리 뒤의 좁은 틈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은 낡은 식기 운반용 승강기로 이어지는, 아무도 쓰지 않는 좁은 통로였다. 우리가 몸을 숨기자마자, 기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복도를 지나쳐 갔다.

“무사하셨군요!”

엘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연막탄 몇 개와 밧줄이 들려 있었다.

“마르셀 경이 일으킨 소요가 예상보다 훨씬 큽니다. 북부 영주들의 사병 일부가 성문 수비대와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황궁의 모든 병력은 그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지금이 빠져나갈 유일한 기회입니다!”

그는 낡은 승강기의 도르래에 밧줄을 묶어, 우리를 아래로 내려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나의 얼굴을 한 그 소녀.

엘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봤습니다. 제가 외부에서 망을 보는 동안, 기사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그 아이를 황궁의 가장 깊은 곳, 지하 감옥이 아니라… ‘별의 요람’이라 불리는 곳으로 옮기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별의 요람?”

“역대 황후들의 안식처입니다. 지금은 폐쇄된 곳이죠. 그곳은 제국의龙脉(용맥), 즉 마력의 흐름이 가장 강하게 모이는 곳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일 겁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머릿속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였다. 나는 누구이고, 그 아이는 누구인가. 어머니는 왜 그런 짓을 했나. 아서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수백 개의 질문이 소용돌이쳤지만, 지금은 답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엘리안이 준비한 밧줄을 타고, 1층의 버려진 주방으로 내려왔다. 지독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먼지가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시궁창 쥐새끼가 되어, 우리가 들어왔던 배수로를 향해 어둠 속을 달렸다. 차가운 오물이 발목을 적시는 감촉이 불쾌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추격의 함성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마침내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배수로의 출구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혀 들어와 타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무도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용병단도, 자금도, 그리고 내가 복수해야 할 명분까지도.

***

우리가 돌아온 곳은 염색 공장이 아닌, 수도 외곽의 무너진 폐신전이었다. 엘리안이 만약을 위해 마련해 둔 두 번째 은신처였다. 이안은 벽에 기댄 채,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찢어진 바지를 걷어 올렸다. 마법진의 화상과 기드온의 검에 스친 상처가 흉측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엘리안이 건넨 소독약과 붕대를 들고,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네 복수도, 내 동생을 구할 단서도.”

그의 목소리에는 자책감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상처에 소독약을 묻힌 천을 눌렀다. 그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내가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지.”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겠어. 내가 누구인지, 그 아이는 누구인지, 그리고 내 어머니가 숨겼던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지 못하면, 내 복수는 그저 공허한 칼부림에 불과해.”

“릴리아.”

그가 내 본명을 불렀다. 그의 손이 붕대를 감는 내 손 위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네가 그림자든, 재앙이든. 내가 아는 건 단 하나야. 너는 내 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나는 네 등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걸로 충분해.”

그의 투박한 위로가, 산산조각 났던 내 마음의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모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 온기가, 지금 나에게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때, 은신처의 입구에서 엘리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밖에서 망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극도의 혼란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장…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추격대라도 온 건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엘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수도에 퍼진 소문… ‘땅거미 상단’이 보낸 답신… 모두 함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시험할 생각 따위는 없었습니다.”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들은… 황태자와 거래를 한 겁니다.”

엘리안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땅거미 상단은 우리에게 자격 증명을 요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목에 가격표를 붙인 겁니다. 전하를… 황태자에게 팔아넘기기 위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믿었던 유일한 동아줄이, 처음부터 우리 목을 조르기 위해 드리워진 교수형 밧줄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이 황태자에게 전하지 못한, 우리에게 보낸 진짜 메시지입니다.”

엘리안은 또 다른 양피지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은 이전에 받았던 피 묻은 잉크의 쪽지와는 다른, 평범한 양피지였다. 그 안에는 간결하고도 무자비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림자의 값은 금괴 천 개. 혹은, 그대의 ‘진짜’ 심장. 선택은 구매자의 몫.」

그리고 그 아래,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판매자는, 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