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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제18화: 피의 자격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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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냄새가 나는 잉크였다.

내 손에 들린 양피지는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조롱이자, 거역할 수 없는 사형 선고였다. ‘황태자 아서’. 내 오라비의 이름이, 내 복수의 여정을 가로막는 거대한 단두대처럼 버티고 섰다.

“……죽이라고?”

이안의 목소리가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 그가 내 손에서 쪽지를 낚아채 구겨버렸다. 억눌린 분노로 그의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격렬하게 맥동하며,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부풀어 올랐다.

“놈들이 미쳤군. 황태자를 죽여? 지금 우리 보고 제국 전체와 전쟁이라도 벌이라는 건가! 이건 우리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의 외침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를 찢고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옆에 서 있던 엘리안의 얼굴은 이미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황궁, 특히 황태자의 거처인 동궁은 제국 최강의 마법 방어벽과 진홍의 사자단 정예 기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파리 한 마리 얼씬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암살은… 자살 행위입니다.”

엘리안의 냉정한 분석은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았다. 이안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그의 눈은 절망과 광기가 뒤섞여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솔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철 같던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지? 이대로 손 놓고 이솔데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라고? 차라리 황궁에 쳐들어가서 그 개자식의 목이라도 물어뜯고 죽는 게 낫겠어!”

그는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무모한 죽음을 맞이할 기세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고개가 돌아간 그의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떠올랐다. 이안과 엘리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나를 향했다.

“정신 차려, 늑대.”

내 목소리는 얼음 조각을 삼킨 듯 차가웠다.

“네놈의 그 뜨거운 분노가 네 동생을 살릴 수 있나? 지금 네가 할 일은 이빨을 드러내고 울부짖는 게 아니라, 머리를 숙이고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숨기는 거야.”

내 눈은 그의 불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안에서 이글거리던 광기가, 내 차가운 시선에 짓눌려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놈들은… 우리에게 황태자의 목을 가져오라고 했어.”

내가 바닥에 떨어진, 구겨진 양피지를 주워 펴며 말했다.

“‘목’이 아니라, ‘피’로 자격을 증명하라고 했지.”

내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양피지로 향했다.

“‘그대의 피로 자격을 증명하라.’ 왜 하필 피일까? 암살의 증거라면 목이나 심장이 더 확실할 텐데. 이건 명령이 아니야. 수수께끼지. 놈들은 우리가 정말로 황태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우리가 그만큼의 대담한 일을 저지를 배짱과 능력이 있는지 시험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황태자의 피를 몰래 훔쳐 오기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엘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것 역시 암살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더 상징적인 무언가야.”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흩어진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마르셀이 말했던 귀족들의 반란, 황태자의 독단적인 성격, 그리고 ‘땅거미 상단’의 교활함.

“황태자 아서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면 뭘까? 그가 흘리는 피보다 더 치명적인 상징이 될 만한 것.”

내 질문에, 엘리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권력… 명예… 그리고 정통성. 황태자 전하께서는 선왕의 적장자이지만, 2황후와 그 세력은 끊임없이 그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려 시도해왔습니다. 특히… 선황후 폐하, 즉 전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 입지가 더욱 불안정해졌죠.”

“그래, 정통성.”

나는 눈을 떴다. 내 눈에는 이미 사냥감의 급소를 포착한 포식자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황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 그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증표. 그걸 훔치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놈들의 심장에 칼을 박는 것과 같아. 황태자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고, 그의 권위를 대중 앞에서 발가벗기는 행위지. ‘피’보다 더 붉고, 진한 굴욕을 안겨주는 것. 그것이 땅거미 상단이 원하는 ‘자격 증명’일 거다.”

***

작전은 그날 밤, 즉시 개시되었다. 엘리안은 그의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황궁 내부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몇 시간 뒤, 그는 땀에 젖은 채 다급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찾았습니다. 바로 내일 밤입니다. 황실의 가장 깊은 곳, ‘태양의 방’에서 황태자 전하께서 비밀 의식을 거행하신다고 합니다.”

“무슨 의식이지?”

“역대 황제에게만 계승되어 온 성물, ‘사자의 심장’을 하사받는 의식입니다. 루비로 만들어진 그 보석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제국의 마력의 근원과 연결되어, 소유자에게 강력한 힘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신물이라고 전해집니다. 본래 즉위식 때 계승되는 것이 관례지만, 황태자께서는 반대파 귀족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기를 앞당겨 의식을 치르려는 겁니다.”

완벽한 목표물이었다. ‘사자의 심장’. 이름부터가 우리가 찾던 해답을 외치고 있었다.

“의식의 경비는?”

이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아 있었다.

“철통같을 겁니다. 태양의 방은 황궁의 심장부. 그곳으로 가는 길목마다 마법 감지 장치와 정예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의식이 거행되는 시간에는 황태자 본인과 의식을 주관하는 최고위 사제, 그리고 진홍의 사자단장 ‘기드온’만이 입실할 수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갈 틈이 없다는 소리군.”

“하지만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안은 낡은 황궁의 설계도를 펼쳤다. 그것은 그가 수년에 걸쳐 몰래 수집하고 완성한, 그의 가장 비싼 정보 자산이었다.

“태양의 방은 황궁의 마력 공급로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급로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선황후 폐하의 개인 기도실 지하를 지나갑니다. 제가 어릴 적 시종으로 일할 때, 우연히 그곳에 낡은 환풍구가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겁니다.”

어머니의 기도실. 그 단어에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내가 가장 사랑했고, 동시에 이제는 가장 증오하게 된 기억이 서린 장소.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그곳이 우리의 유일한 침투로였다.

“내가 간다.”

이안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내 눈에는 차가운 결심이 서려 있었다.

“혼자서는 무리야. 2인 1조로 움직인다. 엘리안, 넌 밖에서 신호를 보내고 우리 퇴로를 확보해.”

“대장,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내 단호한 말에 엘리안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이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작전의 성공을 위한 칼날로 벼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죽음의 구덩이로 함께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의 동생을 위해, 그리고 나의 복수를 위해.

***

다음 날 밤, 황궁의 그림자는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무겁고 깊었다. 달빛조차 숨을 죽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와 이안은 유령처럼 움직였다. 엘리안이 빼돌린 시종의 옷으로 위장한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경비가 가장 허술한 서쪽 담벼락의 낡은 배수로를 통해 황궁 안으로 잠입했다. 역한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우리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도실은 십 년의 세월 속에 버려져 있었다. 모든 가구 위에는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았고, 공기 중에는 잊힌 시간의 냄새만이 떠다녔다. 한때 내 유년의 안식처였던 이곳은, 이제는 차가운 묘비명처럼 느껴졌다.

엘리안의 기억은 정확했다. 제단 뒤편의 낡은 태피스트리를 걷어내자,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좁은 환풍구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먼저 쇠창살을 힘으로 뜯어냈고, 우리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인,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우리는 짐승처럼 기어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사들의 군홧발 소리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얼마나 기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서 희미한 빛과 함께 엄숙한 기도문 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의 방. 우리는 환풍구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낡은 격자 창살 너머로, 방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의 황금 제단 위, 눈을 멀게 할 듯한 붉은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루비, ‘사자의 심장’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흰 사제복을 입은 대사제가, 그리고 그 뒤에는 황태자 아서와 진홍의 갑옷을 입은 기드온이 경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금이다.”

나는 속삭였다. 의식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아서가 보석을 향해 두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 나는 품에서 작은 연막탄을 꺼내, 환풍구 창살 틈으로 던져 넣었다.

펑!

작은 폭음과 함께, 방 안은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찼다.

“침입자다!”

기드온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 안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안은 환풍구 덮개를 걷어차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제단 위의 ‘사자의 심장’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소리 없이 착지하며, 단검을 뽑아 들고 아서에게 달려드는 기드온의 앞을 막아섰다.

챙!

나의 단검과 그의 장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단장. 그의 검은 무거웠고,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은 그의 예측을 벗어난 그림자와 같았다. 나는 그의 힘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대신, 뱀처럼 그의 공격을 흘려내며 그의 움직임을 묶어두었다.

그 사이, 이안은 제단에 거의 도달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리석은 것들.”

연기 속에서 들려온 것은 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차갑고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 동시에, 방의 바닥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복잡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함정이었다.

“크악!”

이안의 발이 마법진에 닿는 순간, 강력한 전류가 그의 온몸을 꿰뚫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경련했다.

“이안!”

내가 그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기드온의 검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옷이 찢어지며 차가운 칼날의 감촉이 피부에 와 닿았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아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아닌, 사냥감을 함정에 몰아넣은 사냥꾼의 잔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누이가, 시궁창 쥐새끼들과 어울려 여기까지 기어 들어올 줄이야. 정말 감동적인 남매 상봉이 아닌가, 카일루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안의 정보, 잊힌 환풍구, 우리의 계획까지 전부. 배신당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엘리안이? 아니면 마르셀이? 머릿속이 혼란으로 들끓었다.

“네놈의 정보원은 누구지?”

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아서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방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붉은 손’ 자카르였다. 그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아서의 옆에 섰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더러운 쥐새끼들을 폐하의 존안까지 끌고 오게 되다니.”

우리가 가진 유일한 군대. 우리가 모든 것을 걸고 손에 넣었던 ‘강철 늑대’. 그 모든 것이 시작부터 황태자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던 장기 말에 불과했다. 절망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 절망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수고했다, 자카르. 약속했던 보상은 두둑이 챙겨주마.”

아서는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사자의 심장’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석이 아니라, 하찮은 돌멩이라도 되는 양 자카르에게 던졌다.

“자, 가져가라. 네놈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니.”

그리고 그는 제단의 숨겨진 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제단이 소리 없이 옆으로 밀려나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비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네가 정말로 훔쳐야 했던 건, 이런 가짜 장난감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동생아.”

아서는 조롱하듯 웃으며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나의 진짜 심장. 제국의 진짜 보물은… 바로 저 아래에 있으니.”

그의 손짓에 따라,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옮겨’ 왔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새하얀 잠옷을 입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 소녀였다.

창백한 피부,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 그리고 굳게 닫힌 눈꺼풀.

그 얼굴은, 끔찍하게도, 나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