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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적신 것은 세라피나의 피였지만, 정작 뜨거운 것은 내 심장이었다. 끈적한 체온이 식어가는 감촉, 코를 찌르는 비릿한 철 냄새, 그리고 텅 빈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늙은 시녀의 마지막 표정. 이 모든 것이 내 안의 무언가를 잔인하게 깨웠다. ‘재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독처럼 퍼져나가며 이성을 마비시키던 바로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용병 ‘그림자’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안, 일기장!”
내 외침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안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굳어 있었지만, 내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피로 얼룩진 일기장을 낚아채 품 안에 쑤셔 넣었다. 동시에, 엘리안은 방 안의 촛대 하나를 걷어차 창가에 드리워진 낡고 두꺼운 커튼으로 던졌다.
화르륵!
기름을 먹은 마른 천이 굶주린 짐승처럼 불길을 삼켰다. 순식간에 방 안은 매캐한 연기와 함께 붉은 화염으로 가득 찼다. 창문을 깨고 들이닥치려던 암살자들의 검은 실루엣이 불길 너머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놈들의 시야와 호흡을 빼앗기 위한, 엘리안의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계단은 막혔을 겁니다! 이쪽으로!”
엘리안이 외치며 벽난로 옆, 낡은 태피스트리를 찢어발겼다. 그 뒤에는 좁고 어두운 하인용 비상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안이 세라피나의 시신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또 하나의 죽음. 우리 때문에 스러져 간 또 하나의 무고한 목숨이었다.
“가!”
내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죄책감에 잠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살아남아 복수하는 것만이, 죽은 자들을 위한 유일한 애도였다.
우리는 쥐새끼처럼 좁고 가파른 계단을 굴러 내려갔다. 등 뒤에서는 암살자들이 외치는 고함 소리와 불길이 터지는 굉음이 지옥의 연주처럼 울려 퍼졌다. 1층 주방으로 이어진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이미 저택의 정문과 후문은 스무 명이 넘는 복면의 무리가 포위하고 있었다. 놈들은 우리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일기장을 확실하게 손에 넣기 위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친 것이었다.
“젠장, 포위됐어!”
이안이 검을 뽑아 들며 이를 갈았다. 사방에서 좁혀오는 칼날의 포위망. 빠져나갈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주방의 거대한 조리대를 발판 삼아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놈들이 예상치 못한 곳, 낡은 식료품 저장고로 이어지는 천장의 작은 문을 걷어찼다.
“위로!”
내가 먼저 좁은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자, 이안이 엘리안의 등을 받쳐 위로 올려 보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순간, 암살자들의 칼날이 그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다락방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썩은 나무 냄새와 먼지가 폐부를 찔렀다. 아래층에서는 문을 부수고, 우리를 찾기 위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지붕으로 가야 해.”
나는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다락방의 낡은 창문을 찾았다. 비바람에 삭은 나무 창틀은 약간의 힘만으로도 쉽게 부서졌다. 차가운 밤비가 기다렸다는 듯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비에 젖은 미끄러운 지붕 위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겼다. 발밑으로 수십 개의 횃불이 저택 주변을 악마의 눈처럼 밝히고 있었다. 놈들은 아직 우리가 저택 안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우리는 지붕의 가장자리를 타고, 저택 뒤편의 거대한 고목이 가지를 뻗은 곳으로 향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
우리가 몸을 숨긴 곳은 저택에서 반 마일쯤 떨어진, 낡은 사냥꾼의 오두막이었다. 비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폐가였다. 이안은 찢어진 셔츠 자락으로 자신의 발목에서 흐르는 피를 동여맸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육체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엘리안은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인 육포와 물주머니를 꺼내 우리 앞에 놓았다. 하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는 타다 남은 모닥불의 희미한 온기와 함께, 무겁고 질식할 듯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모두의 시선은 이안의 품에서 나온, 피와 빗물로 얼룩진 일기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일까?”
이안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네가… 재앙이라는 말. 선황후께서 직접 쓰신….”
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재앙’. 그 단어는 이제 우리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이자, 누구도 함부로 만질 수 없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내 존재 자체가 저주라면, 내 복수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재앙의 몸부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5년간 나를 지탱해 온 복수라는 기둥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 결속’.”
엘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더듬는 학자처럼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고대 문헌에서 몇 번 언급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금지된 황실의 비술 중 하나라고… 한 존재의 영혼이나 운명을 다른 대상과 억지로 연결하는 의식입니다. 보통은 강력한 마력을 가진 유물이나, 혹은… 신성한 혈통에 그 힘을 묶어 더 강력한 후계자를 얻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지?”
이안이 다그치듯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쩌면 전하의 잠재된 힘을 황실의 운명과 결속시키려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된 것이겠지요. ‘재앙을 깨웠다’는 표현은, 아마도 전하께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억지로 몸에 담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안의 추측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나는 괴물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 안에 품고 살아가는 시한부 괴물.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두려워했던 것뿐이다. 내 모든 유년기의 기억이 거짓된 위선으로 덧칠되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럼 이솔데의 저주는….”
이안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떨려왔다.
“어쩌면, 놈들은 처음부터 일기장을 노린 게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놈들의 진짜 목표는 일기장이 아니라, 그 일기장을 통해 전하를 찾아내고, 전하의 안에 잠들어 있다는 그 ‘재앙’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을지도… 이솔데 영애의 저주는 그 모든 것을 위한 미끼였을 뿐입니다.”
모든 조각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졌다. 황혼의 교단은 해독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원한다. 어쩌면 그들이 숭배한다는 ‘여신’을 옥좌에 앉히기 위해, 제국을 삼킬 ‘재앙’인 나를 이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복수의 주체에서, 어느새 거대한 음모의 중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장기 말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빗물에 젖어 차갑게 식은 내 손 위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왔다.
“릴리아.”
그가 처음으로 내 본명을 불렀다. 가면도, 위장도 없는, 오직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네가 재앙이든, 괴물이든, 내게는 상관없어.”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동정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부서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연대감과 절박한 결의만이 담겨 있었다.
“너는 내 동생을 구할 유일한 희망이야. 그리고 나는, 네가 짊어진 저주를 함께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니 무너지지 마. 제발….”
그의 목소리가 끝내 가늘게 떨려왔다. 강철 같던 남자의 애원이, 내 얼어붙은 심장의 가장 깊은 곳을 후벼 팠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계약이었다. 동맹도, 거래도 아닌, 서로의 지옥을 함께 건너기로 한 이름 없는 맹세였다.
***
우리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우리는 피로 얼룩진 일기장을 다시 펼쳐 들었다. 단서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솔데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상합니다.”
몇 시간째 일기장의 모든 페이지를 샅샅이 훑던 엘리안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밤샘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발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황후 폐하의 필체는 부드럽게 이어 쓰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문장의 마지막 획은 항상 가늘게 흘리시는 버릇이 있으셨죠. 그런데… 이 마지막 페이지, ‘재앙을 깨웠다’는 이 문장만큼은….”
엘리안은 손가락으로 문제의 문장을 가리켰다. 이안과 나는 그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 ‘다’ 자의 끝이, 마치 칼로 자른 듯 날카롭게 끊어져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강한 힘을 주어 쓴 것처럼. 공포에 질려 떨면서 쓴 글씨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입니다.”
그의 말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일기장을 빼앗아 들고, 촛불 아래에 바싹 가져다 댔다. 엘리안의 말이 맞았다. 어머니의 다른 기록들과는 명백히 다른,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위화감. 잉크가 종이에 스며든 깊이마저 달랐다. 마치 누군가가, 어머니의 원래 기록 위에 이 문장을 덧씌운 것처럼.
“덫이었어….”
이안이 핏기 없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엘레노어… 그 여자가 꾸민 짓이야. 그녀는 선황후의 필체를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테니.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고, 이 거짓된 유언으로 당신을 절망에 빠뜨린 다음… 당신을 사로잡으려 했던 거야.”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 여자는 내 어머니를 죽인 것도 모자라, 죽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나를 기만하고 농락하려 했다. 내 가장 깊은 상처를 헤집고, 내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어 나를 무너뜨리려 했다.
나는 일기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스러질 듯한 낡은 종이가 내 손아귀 안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복수는 뜨거울 때 해야 제맛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복수는 가장 차갑고,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날카롭게 벼려야 하는 법이다. 나는 심호흡하며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안과 엘리안을 돌아보았다. 내 눈에 서린 것은 더 이상 절망이나 혼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자의, 차디찬 섬광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이 아니었군.”
내 목소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잔잔했다.
“엘레노어가 보낸 초대장이었어.”
나는 피로 얼룩진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망설임 없이 찢어냈다. 그리고 그 종잇조각을 타오르는 모닥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거짓된 유언은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검은 재로 변해갔다.
“이제 사냥의 규칙이 바뀌었어. 쥐를 쫓는 건 여기까지다.”
불길이 내 눈동자 안에서 춤을 추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덫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