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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기장.
그 세 단어가 내 심장에 얼음 가시를 박았다. ‘귀 없는 자’의 뱀 같은 속삭임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모든 과거를 헤집어 깨웠다. 따스했던 어머니의 품, 그녀의 서재를 가득 채웠던 낡은 종이와 잉크 냄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공허한 눈동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단어, ‘일기장’과 함께 핏물처럼 역류했다.
이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정보상의 멱살을 잡을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일기장이 어디에 있지?”
“나 같은 하수구 쥐가 어찌 그런 귀한 물건의 행방을 알겠소. 다만, 그 물건이 아직 세상에 존재하며, ‘땅거미 상단’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것. 그게 내가 팔 수 있는 정보의 전부요.”
‘귀 없는 자’는 교활하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이미 내 단검에 새겨진 ‘그림자’의 표식에 모든 걸 내건 도박을 마친 뒤였다. 더 이상 우리에게 내어줄 패는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좌판에 박았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쇠붙이의 감촉이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주었다. 어머니의 유품.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내 복수의 이정표이자,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 담겨 있을 판도라의 상자였다. 황혼의 교단이 해독제보다도 더 간절히 원하는 물건이라면, 그 안에는 저들을 파멸시킬 무언가가 잠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가자.”
나는 이안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그는 불만과 초조함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저놈을 족치면…!”
“저놈의 목을 비튼다고 네 여동생의 저주가 풀리진 않아. 놈들은 우리에게 미끼를 던졌어. 이제 우리가 그 미끼를 물지, 아니면 더 큰 낚싯대를 준비할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야.”
내 차가운 말에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분노의 불길이, 차가운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귀 없는 자’의 음흉한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다시 침묵의 시장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희망을 찾아 들어왔던 하수구는, 더 깊은 절망의 입구에 불과했다.
***
지하 창고로 돌아온 우리는 마치 허파를 잃은 사람처럼 침묵했다. 엘리안이 가져온 딱딱한 빵과 치즈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시간은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처럼 야속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안은 벽에 기댄 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강철 같던 남자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그 어떤 전투의 패배보다도 더 참혹했다.
“방법을 찾아내.”
내가 정적을 깨고 엘리안에게 명령했다.
“선황후 폐하의 유품. 그중에서도 일기장. 폐하께서 돌아가신 직후, 황궁의 모든 기록과 유품은 불태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면, 분명 누군가의 손을 거쳤을 터. 당시 황후궁에 속해 있던 모든 시녀와 관리들의 목록을 가져와. 살아있는 자, 죽은 자 가릴 것 없이 전부.”
“대장… 하지만 그건….”
엘리안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5년 전의 기록, 그것도 황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파헤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네 동생이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내 유령이라도 붙잡아 와야 할 거다.”
내 목소리가 이안을 향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발 선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안에는 원망과 애원이 뒤엉켜 있었다.
“내 동생은 당신의 과거놀음에 희생될 만큼 한가하지 않아, 황녀.”
“내 과거가 바로 네 동생의 목에 걸린 저주의 시작점이야, 늑대.”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처럼 부딪혔다.
“엘레노어는 내 어머니를 배신했고, 그 죄의 대가로 얻은 힘으로 네 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어. 일기장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유일한 열쇠다. 네가 감정에 눈이 멀어 그 사실을 외면한다면, 네 손으로 직접 동생의 무덤을 파게 될 거야.”
내 말은 잔인했지만, 사실이었다. 이안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부서진 신상처럼, 고통스러운 침묵 속으로 다시 가라앉을 뿐이었다.
엘리안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창고 안에는 다시 나와 이안, 단둘만이 남았다. 타다 남은 촛불이 그의 얼굴 위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고통이 마치 내 것인 양,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려왔다.
나는 말없이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주었다. 위로도, 동정도 아니었다. 그저 ‘나도 이곳에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는 놀란 듯 잠시 굳었지만, 이내 내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부서진 조각들을 말없이 기댄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
밤이 뜬눈으로 지나갔다. 동이 틀 무렵, 잿빛 얼굴의 엘리안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먼지 쌓인 두루마리 몇 개와 낡은 명부철이 들려 있었다. 그는 밤새 수도의 모든 정보상을 들쑤시고, 뇌물과 협박을 동원해 이 조각들을 긁어모은 것이 틀림없었다.
“찾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눈은 승리의 빛으로 반짝였다.
“선황후 폐하의 유품 대부분은 소각 처리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당시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수석 시녀, 세라피나 영애만이 처분 목록에서 누락된 상자 하나를 개인적으로 불하받았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지?”
이안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희망의 불씨가 그의 눈에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직후, 그녀는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그 후로는 수도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치…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려는 사람처럼요.”
엘리안은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도에서 마차로 반나절은 족히 가야 하는, 잊혀진 숲속의 낡은 저택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즉시 말을 준비했다. 지체할 시간이 단 1초도 없었다. 이솔데의 손등에 새겨졌던 붉은 장미 넝쿨 문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수도를 빠져나가는 길은 삼엄했다. 황태자가 내린 수색 명령으로 모든 관문이 닫혔지만, 엘리안이 미리 파악해 둔 낡은 하수도를 통해 우리는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지독한 악취를 뚫고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새벽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향해, 세 마리의 말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
세라피나의 저택은 몰락한 귀족의 초상화처럼 스산했다. 담쟁이덩굴이 낡은 석벽을 집어삼킬 듯 휘감고 있었고, 깨진 창문은 마치 텅 빈 눈구멍처럼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낙엽 썩는 냄새와 짙은 흙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소리 없이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버려진 지 오래된 유령의 집 같았다. 모든 가구 위에는 하얀 천이 씌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우리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찍어냈다.
“여기서 사는 게 맞아?”
이안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 저택 2층의 삐걱거리는 복도 끝에서 희미한 촛불 빛이 새어 나왔다.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우리는 칼을 뽑아 든 채, 소리를 죽여 계단을 올랐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흐느끼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안과 눈짓을 교환하고, 망설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방 안은 수십 개의 촛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벽난로 앞의 낡은 흔들의자에,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성서를 끌어안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세라피나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대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올 것이 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낙엽처럼 메말라 있었다.
“황혼의 교단에서 보낸 암살자인가요? 아니면, 황태자 전하의 그림자인가요?”
“우리는 둘 다 아니다.”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두건을 벗어 내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비틀거리며, 내 얼굴을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카… 카일루스 황녀 전하…! 살아… 살아 계셨군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세라피나. 어머니의 일기장,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맞나?”
내 질문에,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벽난로의 헐거운 벽돌 하나를 빼냈다. 그 안에는 낡은 가죽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넸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 상자를 주시며, 언젠가 전하께서 진실을 찾으러 오실 때까지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폐하의 마지막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낡고 손때 묻은, 내 어머니의 필체로 가득한 일기장이 고이 놓여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일기장을 펼쳐, 가장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어머니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잉크는 곳곳이 눈물에 번진 듯 얼룩져 있었고, 필체는 공포와 절망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고, 그 마지막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안과 엘리안 역시 내 어깨너머로, 그 끔찍한 진실을 함께 목격하고 있었다. 일기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독에 중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범인의 정체도.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 다음 문장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죄다. 10년 전, 내가 카일루스를 위해 행했던 금지된 ‘마법 결속’ 의식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왔다. 내 딸은 제국의 축복이 아니었다. 나는 내 욕심으로 제국을 삼킬 재앙을, 내 손으로 직접 깨워버렸다.」
재앙. 내 존재가… 재앙이라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괴물이란 말인가? 내 복수는 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재앙이 벌이는 또 다른 파괴에 불과한 것인가?
그때였다.
퓽!
창문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은 화살 한 발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피할 새도 없이, 화살은 세라피나의 가슴 한복판에 정확히 박혔다.
“크헉…!”
그녀는 짧은 비명을 끝으로, 눈을 뜬 채 그대로 내 품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피가 내 손과 일기장을 붉게 물들였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번뜩이는 칼날과 복면을 쓴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