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박물관의 회랑은 조용했다. 오후의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그 안에 먼지가 춤을 춘다. 나는 톰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동의 모래 속에서 함께했던 그 남자를.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벤, 정말 오래간만이야,"
톰이 말했다. "그래. 중동 이후로는 처음이구만. 전쟁터에서 같이 뛰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데 무슨일로 날 불렀지??" 톰이 말했다.
"있어. 그것도 꽤 중요한 거야."
톰은 갑자기 나를 이끌어 박물관의 한구석으로 갔다.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의 손이 주머니로 갔다.
"벤, 페이퍼 클립을 알아?"
톰이 먼저 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페이퍼 클립? 그게 뭔데?"
톰이 종이를 꺼냈다.
"CIA 내부의 문서 중 하나야. 대략 내용은 세계대전 이후 전후처리 과정중 미국과 소련이 독일에 있는 몇몇 박사와 과학자들을 데려간 거지. 자네 폰 브라운이라고 아나?"
"그 로켓과학자 말인가?"
"그 사람 지금 미국에서 로켓 과학자로 일하고 있어. 대단하지 않나? 1945년 이후 나치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종이를 내 면전에 펼쳤다.
"그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기록이 하나 있어. 페이퍼 클립에 등재된 과학자 중에 '브란덴부르크 남작'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다른 과학자들은 다 실명이 적혀 있어. 약력도 있고. 근데 이 사람은... 실명이 없어."
톰이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워낸 것처럼 말이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실명은 물론이고 지금 어디 거주하며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가 되어있는데 브란덴부르크 남작은 그게 없어. 대신 이력서는 그 어떤 과학자 보다 대단했지"
톰은 종이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그의 손에 사망한 유대인의 수 '991,345". 거진 100만 가까운 숫자였다. 나는 그 숫자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브란덴부르크 남작은 이미 죽었어," 나는 톰에게 말했다. "전후에 실명 처리됐다가, 서독의 뒤셀도르프에서 40킬로 떨어진 외각 마을에서 시체로 발견됐어. 나는 그 수사에 참여했었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모르게.
"당시에 그를 조사하고 싶었어. 물어볼 것도 많았어. 하지만 그는 아무런 죄값도 받지 않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쓸쓸한 주검으로만 남겨져 있었어. 애석하지... 어떻게든 죗값을 받아 냈어야 하는데." 톰이 내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벤. 남작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톰을 바라봤다.
"우리 요원 중 한 명이 봤어. 모사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잡으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역을 수사하던 와중에, 우리 CIA 도 그 근처의 집들을 수사했어. 혹시 모를 이스라엘과 아르헨티나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서 우리가 모사드와 아르헨티나 정부 몰래 이 일을 수사했지. 그런데 그 근처에 있는 집 주소와 주인의 신상을 보고 있었어. 근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지 ."
톰이 천천히 말했다.
"원래 나치 잔당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현지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마련이거든. 꽤나 평범한 사람인 척하면서 말이야. 근데 이 집주소는 집주소 명의도 볼 수 없고. 심지어 가족도 없었어. 게다가 다른 나치 잔당 모임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하루에 한번 하녀 한명이 집에 먹을것을 갔다 주는거 말고는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아. 미국 정부에서 숨겨준다 한들 왜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고 왜 아르헨티나에 계속 내버려두는지도 의문이고."
나는 침을 심킨뒤 말했다. "그러면 그 자가 브란덴부르크 남작이라는 이유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이봐, 내 말을 끝까지 들어. 그래서 그때 당시 우리 요원이 집 주변을 훑어보면서 쓰레기 더미에서 종이 한장을 가져올 수 있었지. 바로 이거야."
톰은 프린트 된 종이 한장을 나에게 건냈다. 그리고 그 종이에서는 워싱턴 주 우체국으로 붙이는 장문의 편지였다. 편지의 맞춤법이 틀렸는지 종이를 갈기갈기 찢은듯 했다.
"미 상무부로 보내는 편지였어. 내용을 대충 보자면.."
"현재 복스로 인한 연구 결과 보고서를 미 상무부에 보고 합니다? 이거 브란덴부르크 남작..." 그러자 톰이 놀란듯 말했다.
"자네 혹시 알고 있었나?"
그렇다. 브란덴부르크 남작은 평생을 복스 감염병 치료에 매진하던 과학자였다.
"미 정부 측에서도 이 사람을 감싸주는 이유가 있을거야. 아마 치료제 개발때문에..."
"하지만 100만명을 죽였어. 자그마치 100만이라고" 그러자 톰은 쓸쓸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됐고. 그 주소는 어딘가?"
"왜, 상무에 보고하려고? 포기해. 어차피 허락나지 않을거야. 모사드도 암묵적으로 묵인해줬거든."
"왜지?"
"이유야 단순하지. 남작은 아이히만이 아니니깐. 그가 없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수도 있으니깐.그렇지."
톰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히 알려준거 같기도 하고. 참 미안하네. 하지만 일단 알려주고는 싶었어. 자네를 위해서."
그 뒤로 톰은 쓸쓸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톰이 쥐여준 '페이퍼 클립 작전' 에대한 보고서를 손에 쥐며 멀어져 가는 톰의 등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깨워에 뭔가가 놓여져 있길래 옆을 보았다. 작은 쪽편지였다. Calle Humboldt 4173, Piso 3°, Depto. B Palermo, C1414CTS 바로 아르헨티나의 주소였다. 그리고 그 밑에는 무훈을 빈다' 라는 쪽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