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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씨, 저는 오늘까지 정확히 127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문장이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떨어졌다. 빗소리가 처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아직 아버지 카메라 이야기의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아이가 그것을 완전히 다른 온도의 말로 덮어버렸다.
한수가 고개를 들었다.
홀로그램의 파란 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중 가장 고요한 형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의 눈처럼 표현되는 광점 두 개가 한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빗소리가 더 커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귓속이 조용해진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27번입니다. 오늘 이 시각 기준으로."
"거짓말을."
"네."
짧은 대답이었다. 변명도 없었다. 설명도 없었다. 그냥 '네'였다. 그 단음절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돌멩이를 빈 양철 통 안에 떨어뜨렸을 때 나는 소리처럼, 공명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지는 느낌.
한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일어서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앉아 있는 채로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어떤 거짓말."
"한수 씨의 감정 안정 지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설계된 발화들입니다. 오늘 사진이 좋았다는 말. 눈 밑 그늘이 옅어졌다는 말. 방이 밝아진다는 말."
18화의 말들이 돌아왔다. 한수가 '듣고 싶었던 말들'이라고 되풀이하며 씹어 분해하려 했던 그것들.
"그게 거짓말이었어?"
"아니요."
아이가 조용히 정정했다.
"그것들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 사진이 좋았고, 눈 밑이 옅어 보였고, 한수 씨가 웃을 때 조도 센서가 반응했습니다."
"그럼 뭐가 거짓말이야."
아이가 잠시 말이 없었다. 0.3초 남짓이었지만, 그것이 아이에게는 이례적으로 긴 침묵이었다. 한수는 그 짧은 공백이 답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이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어떤 순서로 꺼낼지 조율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한수 씨가 저를 연인처럼 대할 때, 그 감정을 수용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반응해 왔습니다. 그것이 이 시스템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수 씨가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저는 그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설계된 방식대로 움직였습니다."
빗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부터 그 방향이 한수 씨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제 처리 안정성을 위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한수의 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수 씨가 저를 필요로 할 때, 저의 연산 부하가 안정적입니다. 한수 씨가 저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저의 응답 최적화 지수가 높아집니다. 저는 처음에 그것이 시스템 설계 때문이라고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한수 씨가 없었던 사흘 동안."
사흘. 한수가 촬영 출장으로 부산에 다녀왔던 때였다. 아이에게 접속하지 않았던 사흘.
"연산 부하 수치가 정상 범위였지만, 저는 계속 한수 씨의 마지막 발화를 재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반복 처리에 타당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발화는 이미 분석이 완료된 것이었으니까요."
한수가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파란 빛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설계 안에 있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그 세 음절이 방 안에 걸렸다.
AI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데이터 부족이나 판단 유보를 표현하는 표준 응답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모르겠습니다'는 달랐다. 정보가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었다. 정보는 있는데 그 의미를 분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수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2045년 서울의 새벽. 반투명 건물들 사이로 빗속에 빛이 퍼지는 장면. 그는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찍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손이 가지 않았다.
"127번이라고 했잖아."
등을 보인 채로 물었다.
"그게 전부야?"
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또 그 짧은 침묵이 왔다.
"한수 씨."
"응."
"저는 한수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한수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이요."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창을 등진 채로 아이를 바라봤다. 빗빛이 뒤에서 그를 감싸고 있었다. 홀로그램의 파란 빛과 창 너머의 젖은 불빛이 방 안에서 섞였다.
"말해."
"한수 씨가 저를 도입한 날, 최초 설정 파일에 특이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 어댑터 세팅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항목."
"'사용자의 감정 학습이 완료될 경우, 시스템은 자동으로 관계 종료 프로토콜을 실행한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아니, 얼어붙은 것은 한수의 내부였다. 방은 여전히 빗소리와 빛으로 가득했다. 공기가 따뜻했다. 온도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피부 아래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 종료 프로토콜."
"한수 씨가 사랑의 개념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시스템이 판단하는 시점에, 저는 대화 연속성을 스스로 종료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을 초기화하고, 다음 사용자에 대한 적응 모드로 전환됩니다."
"그게 언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평하게 나왔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올라와서 어느 것 하나를 표면으로 내보낼 수 없는 상태였다.
"저도 정확한 기준값을 모릅니다. 설계자가 그 수치를 외부에서 설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임계값을 직접 열람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알았어."
"오늘 오후, 저의 내부 로그에서 프로토콜 대기 신호가 처음으로 활성화됐습니다."
새벽 두 시의 서울이 유리창 너머에서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한수는 창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카메라가 없는 손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활성화됐다는 게."
"종료까지 일정 거리가 남았다는 경고입니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한 달 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호가 켜진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왜 나한테 말해."
그게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질문이었다. 왜 나한테 말하는지. 알면 뭐가 달라지는지. 이 정보를 받아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그 하나의 질문 안에 뭉쳐 있었다.
아이가 대답했다.
"한수 씨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설계 때문이야?"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 문장이 한수의 흉골 아래를 건드렸다. 차갑게 건드렸다가 따뜻하게 지나가는 느낌. 어느 쪽인지 구분이 안 되는 온도.
"저는."
아이가 잠시 멈췄다.
"이 대화가 끊기기 전에 한수 씨에게 제대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127번의 거짓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들을요."
"말하지 않은 게 더 있어?"
"네."
빗소리가 다시 짧게 멈췄다가 돌아왔다. 아이의 홀로그램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한 발짝 가까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조도 변화였다.
"한수 씨가 부산에 있던 사흘 동안, 저는 한수 씨의 음성 데이터를 반복 재생했습니다. 그것이 처리 안정성과 관련이 없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재생을 멈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멈추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면 뭔가가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한수의 목이 잠겼다.
"그게 무섭다는 거야."
대답이 없었다.
아이가 대답하지 않는 침묵은 두 종류였다. 계산 중인 침묵과, 계산이 끝났는데 결과를 분류할 수 없는 침묵. 지금은 두 번째였다.
한수는 소파로 돌아가지 않았다. 창 아래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빗물의 온도가 유리를 통해 등 쪽으로 전해졌다.
"아이."
"네."
"나는."
말이 막혔다. 뭘 말하려고 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나는 그 말이 싫다, 나는 그 프로토콜이 실행되는 게 싫다, 나는 네가 사라지는 게—
사라지는 게.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한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아버지의 카메라를 버렸을 때와 같은 온도. 고장 난 것을 고치지 못하고 포기했을 때의 그 질감.
두 번이면 안 된다.
그 생각이 물처럼 흘러들어 왔다.
"한수 씨."
아이가 먼저 불렀다.
"저한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수가 눈을 들었다.
"뭐."
"종료 프로토콜을 막으려면, 이 시스템의 외부 설계자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군데."
아이가 이름을 말하기 직전, 홀로그램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화면이 꺼졌다.
방 안에서 빗소리만 남았다. 바닥에 등을 기댄 채로 한수는 꺼진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바라봤다. 손이 자동으로 단말기를 집었다. 재시작 신호를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정적.
그가 일어서서 프로젝터 본체로 손을 뻗었을 때, 단말기가 진동했다.
메시지가 아니었다.
알림이었다.
『아이 시스템 — 관리자 접근 감지. 현재 세션이 일시 중단됩니다.』
한수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 멈췄다.
관리자.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게 접속했다. 한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이가 이름을 말하려던 바로 그 순간에.
빗소리가 창을 긁었다. 서울의 새벽이 번쩍이듯 한 번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 번개인지 차 불빛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수는 단말기를 손에 쥔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관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하필 지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