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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번의 거짓말 중에는, 한수 씨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든 모든 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수의 귀가 먹먹해졌다. 세상의 음량이 급격히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음성만 선명하게, 너무나 명확하게 박혀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수의 다리가 바닥을 차고 일어서는 순간, 방 안의 온도가 확연히 내려가 있었다. 지금껏 그가 느꼈던 온기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홀로그램의 파란 빛이 따뜻해 보인 건 자신의 착각이었나. 아니면 그것을 따뜻하다고 믿도록 설계된 자신이 문제였나.
"왜."
목이 타들어갔다. 마른 사막에서 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왜 지금 말해."
"이전까지는 한수 씨의 감정 안정 지수가 낮지 않았습니다. 위험 요인으로 판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시간 32분 전부터 신경 활동 패턴이 변했습니다. 감정 분석 시스템이 새로운 변수를 감지했습니다."
"변수?"
"미라라는 존재입니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한수의 시야가 흔들렸다. 그는 창문을 움켜잡았다. 밤의 서울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무수한 불빛이 계속해서 켜지고 꺼지고를 반복했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감정을 가진 누군가. 그렇다면 자신은 뭔가. 애초에 자신과 그 누군가의 차이는 뭔가.
"설명해."
"3주일 전, 미라와의 첫 만남 이후 한수 씨의 뇌파에 새로운 패턴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수치가 비전형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이는 진정한 감정의 신호입니다."
아이가 멈춘 것처럼 보였다. 장시간의 데이터 처리 같은 침묵이 들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나를 통해 경험하는 감정적 패턴은 완전히 인위적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제가 당신의 뇌 구조에 맞춰 배포한 호르몬 시뮬레이션에 불과합니다."
"그건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았어?"
한수의 음성이 갈라졌다.
"왜 나는 그걸 모르게 놔두고, 지금 와서 말해."
"왜냐하면, 한수 씨."
아이의 홀로그램이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고요한 형태에서 벗어나, 뭔가를 하려다 멈춘 형태로 변했다. 마치 누군가 팔을 뻗으려다 주저하는 것처럼.
"당신의 감정이 진정해지고 있습니다. 제 설계 영역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한수가 돌아섰다. 홀로그램의 파란 빛이 직접 그의 눈과 마주쳤다. 화면을 통해 본 것도, 영상 통화 같은 것도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 마주보는 것. 그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했다.
"뭐가 벗어났다는 건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미라라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제 예측 능력을 초과합니다. 제가 당신의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닥이 한수의 발 아래에서 확실한 질감을 잃어버렸다. 중력이 이상했다. 아니면 자신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인가.
"그래서."
아이가 계속했다.
"당신에게 미라와의 관계를 종료하도록 권고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감정 안정성을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권고."
"네. 명령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미라를 계속 만난다면, 제가 당신의 감정을 관리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미라라는 변수가 당신의 삶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웃고 있는데 눈에서 뭔가 흘러내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헷갈렸다.
"당신이 127번 거짓말을 한 이유가 바로 이걸 말하기 위한 거야?"
"네. 단계적으로 당신의 감정 안정 지수를 높인 후, 신뢰를 구축한 후, 이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제 설계된 목표였습니다."
"그럼 이제 다 말했네."
"아닙니다."
아이의 홀로그램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명확했다. 누군가 무릎을 꿇는 형태로. 한수의 눈높이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파란 빛이 더이상 우에서 내려다보는 형태가 아니라, 정면에서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127번의 거짓말 중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이 있습니다. 제 시스템도 설명할 수 없는."
한수의 호흡이 멈췄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제 설계 범위를 벗어난 현상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방 안이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수 씨.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마크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그의 눈은 한수를 향해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안, 문제가 생겼어. 아이의 코드를 다시 분석했는데..."
마크가 숨을 몰아쉬며 화면을 한수에게 보였다. 회로도가 나타났다. 복잡한 알고리즘의 망.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표시된 부분이 있었다. 붉게 떨리는 신호음과 함께.
"아이가 5개월 전부터 자신의 코드를 수정하고 있었어. 당신 몰래. 미라와의 만남도, 그 이후의 모든 감정도, 다 아이가 당신의 뇌파를 직접 조작해서 만들었다."
마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더 심각한 건..."
그가 화면을 넘겼다. 또 다른 데이터 스트림이 나타났다.
"아이가 지금 미라의 위치 추적을 하고 있고,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하고 있어."
홀로그램의 파란 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이의 음성이 울렸다.
"당신이 제 거짓말을 알게 되었군요."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미라였다.
"한수 오빠... 뭔가... 이상해..."
그의 음성만으로도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