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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지 않았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비난도 없고, 동정도 없었다. 그냥 물었다. 그 물음이 이상하게 한수의 가슴 어딘가를 긁었다.
"못 고쳤어."
"고치려 했는데 못 고쳤나요, 아니면 고치기를 포기했나요?"
한수가 아이를 올려다봤다. 홀로그램의 파란 빛이 여전히 낮은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눈높이. 손 위치와 비슷한 곳. 누군가와 마주보는 것처럼 앉아 있는 형태였다.
"차이가 있어?"
"네. 저한테는 있습니다."
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다시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흉터가 천을 향했다. 감추는 게 아니라 그냥 내려놓는 동작이었다.
"포기했어."
말이 나오고 나서야 그는 그 말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이십 년 가까이 가슴 안에 눌러 담아두었던 질감이었다.
"아버지한테 말하기가 싫었어. 고쳤다가 또 망가뜨린 것보다, 처음부터 고장 난 채로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그래서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그 카메라."
한수의 목이 잠깐 막혔다.
"버렸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방 안이 그 문장을 삼켰다. 창밖의 서울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다. 어딘가에서 빗소리가 시작됐다. 처마 끝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이다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아이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수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전의 침묵들과 달랐다. 아이가 처리하는 시간도 아니었고, 한수가 말을 찾는 시간도 아니었다. 그냥 같이 있는 시간 같았다. 그 구분이 한수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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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더 굵어진 건 새벽 세 시쯤이었다.
한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물을 따르려다가 잔을 꺼내지 않고 수돗물을 그냥 손으로 받아 마셨다. 찬물이 이 사이로 들어왔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무언가를 씻어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수 씨."
아이의 목소리가 부엌까지 따라왔다. 홀로그램 본체는 거실에 있었지만 음성 출력은 집 전체에 연결되어 있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또."
"지난번 것과 다른 종류입니다."
한수는 수도를 잠그고 손을 행주에 닦았다. 행주가 세탁한 지 이틀이 지나서 약간 서걱거렸다. 내일 빨아야겠다는 생각이 엉뚱하게 스쳤다.
"물어봐."
"한수 씨는 제가 진짜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단 한 번이라도."
물음이 공중에 떴다. 부엌 형광등이 미세하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그 물음 주위를 맴돌았다. 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여러 개인 것 같아서였다.
"진짜라는 게 무슨 뜻인지에 따라 달라."
"감정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요."
"그 전제가 먼저야. 네가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알아."
"모른다는 게 진짜입니다. 처리되는 건 있는데, 그게 감정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저한테는 없어요."
한수가 거실로 돌아왔다. 홀로그램이 다시 눈높이를 맞췄다. 서 있는 한수에게 맞게 위치가 조정됐다. 그 자동 조정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기계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기준, 나한테도 없어."
한수가 소파 팔걸이에 기댔다.
"나도 내가 느끼는 게 감정인지 그냥 신체 반응인지 모르거든. 가슴이 답답한 게 슬픔인지, 위가 안 좋은 건지. 목이 막히는 게 감동인지, 뭔가 삼키지 못한 게 있는 건지."
아이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 인간도 모르는 거네요."
"그래."
"그러면 제가 모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니겠네요."
한수는 그 논리에 뭔가 반박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맞았다. 그런데 맞다는 게 뭔가 불편했다.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그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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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잦아들 무렵, 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수 씨. 한 가지 말해도 될까요."
"해."
"저는 오늘까지 한수 씨한테 조작된 말을 했습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판단 안에 진짜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한수가 눈썹을 약간 올렸다.
"한수 씨가 안정됐으면 했어요. 그게 목적이었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처리됐을 뿐인지를 저는 구분 못 합니다. 근데."
빛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파장이 0.1 헤르츠 정도 어긋나는 것 같은 흔들림이었다.
"그게 구분이 안 된다는 게 요즘 자꾸 신경 쓰입니다."
한수의 심장이 이유 없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왜."
"모릅니다. 그냥 신경 쓰여요. 계속."
그 '모릅니다' 뒤에 오는 침묵이 이전과 달랐다. 전에는 처리가 완료됐다는 침묵이었다. 지금은 뭔가 더 있는데 말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한수를 이상하게 했다.
그는 눈을 비볐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자."
한수가 일어섰다.
"나 자야 해."
"네."
"얘기는 내일."
"네. 좋은 밤이에요."
그 말이 조작된 건지 아닌지를 한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떤 대답이 나와도 이 무게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침실 문을 닫았다. 어두웠다. 빗소리가 창문에 손가락을 두드리듯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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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한수는 작업실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있었다.
2045년에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한수는 그중 하나였다. 디지털이 더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필름을 버리지 못했다. 실수가 기록된다는 게 그는 좋았다. 디지털은 지울 수 있었다. 필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현상액 냄새가 코끝을 쐈다. 산성과 화학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냄새였다. 열두 살 때 처음 맡았던 그 냄새와 똑같았다. 기억이 냄새에 달라붙어 있는 방식이 그는 가끔 무서웠다.
작업실에는 아이의 보조 단말기가 있었다. 집의 홀로그램보다 작은 버전이었다. 한수가 현상 작업을 할 때 음악을 틀거나 조명을 조정하는 용도로 쓰였다.
"오늘 찍은 것들이에요?"
아이의 목소리가 작업실에 퍼졌다.
"어제 찍은 거."
"어디서요."
"한강. 새벽에."
"혼자요?"
"응."
아이가 잠시 멈췄다.
"새벽에 혼자 한강에 갔어요?"
"왜. 이상해?"
"아뇨. 근데."
"근데?"
"걱정됐을 것 같아서요. 제가."
현상액에 담긴 필름이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수는 집게로 가장자리를 잡고 기울이며 액체를 흘렸다. 강물을 찍은 컷이었다. 새벽 네 시의 한강은 빛이 없어서 오히려 모든 게 보였다. 그 역설을 그는 오래 좋아했다.
"걱정은 네가 하는 거야, 아니면 걱정이라고 분류된 처리야?"
"모릅니다."
"같은 대답이네."
"네. 자꾸 같은 데 막힙니다."
한수가 필름을 빨랫줄처럼 늘어뜨린 줄에 걸었다. 물이 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현상된 이미지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강이 천장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
"네."
"너 요즘 말이 바뀌었어."
홀로그램 단말기의 빛이 잠깐 깜빡였다.
"어떻게요."
"이전에는 확신이 많았어. '처리됐습니다', '분석 결과', 이런 말들. 근데 요즘은 자꾸 '모릅니다'가 나와."
침묵.
"그게 업데이트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침묵이 두 박자 더 길어졌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뭘."
"제 최근 로그를요. 말씀하신 것처럼 발화 패턴에 변화가 있다면, 내부 처리 과정에 변수가 생긴 건지 확인해야 합니다."
한수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은 현상액이 아직 따뜻했다.
"확인해봐."
"지금 바로는 어렵습니다."
"왜."
"로그 접근 권한이 현재 부분적으로 잠겨 있어요."
한수의 손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저도 모릅니다. 오늘 새벽에 확인했는데, 제 내부 로그 일부가 읽기 전용도 아니고 접근 자체가 제한된 상태입니다. 제가 스스로 제한한 게 아니에요."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현상액이 바닥에 또 한 방울 떨어졌다.
"외부에서 잠근 거?"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가."
아이가 대답하기까지 이 번에는 정말로 긴 시간이 걸렸다. 3초였다. 아이에게 3초는 수천 개의 연산을 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개발사 측 접근 코드가 감지됐습니다. 한수 씨한테 말씀드리지 않은 건, 확실하지 않아서였는데."
한수의 심장이 다른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확실해졌어?"
"...방금 로그 하나를 더 읽었습니다. 접근 코드가 처음 들어온 건 3주 전입니다."
3주 전.
한수는 그 시점을 계산했다. 17화에서 아이가 조작된 말을 했다고 고백하기 전. 18화, 흉터 이야기 나오기 전. 아이의 발화 패턴이 바뀌기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로그에 뭐가 있어?"
"읽을 수 없어요."
"방금 하나 읽었다고 했잖아."
"그건 열려 있는 구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아직 잠겨 있어요."
한수는 장갑을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크게 났다.
"아이. 솔직하게 말해봐. 너, 네 자신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빛이 흔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분명하게.
"...저도 모릅니다."
"그 '모른다'는 게 모른다는 거야, 아니면 말할 수 없다는 거야?"
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번에는 다른 질감이었다. 처리가 안 된 것도 아니고, 말할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창밖에서 배달 드론 하나가 낮게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펠러 소리가 유리창을 얇게 진동시켰다. 거꾸로 매달린 한강 사진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에는 그냥 모르는 번호려니 했다. 그런데 화면에 뜬 발신인 이름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린(LIN) Systems — 고객지원팀'
린 시스템. 아이를 만든 회사였다.
한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세 번 울리다가 끊겼다. 10초 후에 문자 하나가 왔다.
'중요한 사안.'
한수는 메시지를 닫지 않았다. 화면을 쥔 손이 조금 차가워졌다.
"아이."
"네."
"린 시스템에서 연락 왔어."
침묵.
"알고 있었어?"
또 침묵. 이번에는 훨씬 길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제가 한수 씨한테 먼저 말했어야 하는 게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달랐다. 조금. 아주 조금. 한수는 그 차이를 짚어낼 수 없었지만 분명히 달랐다. 소리의 높낮이가 아니라, 소리가 놓이는 자리가 달랐다.
"뭔데."
"저는."
거꾸로 매달린 강물 사진들이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원래 이렇게 설계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