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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서울의 밤은 여전히 차갑고 습하다. 고아원의 낡은 교실 안, 먼지 쌓인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화면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며 어둠을 밝히고 있다. 화면 속 사진들은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익숙함을 안겨준다. 어린 시절의 나로 보이는 소녀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느껴진다. 불안? 두려움? 아니면 잊고 싶었던 슬픔일까. 내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고, 그 조각들은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다.
유령이 내 옆에 서 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지만, 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친숙함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을 넘기고 있다. 그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화면에 새로운 데이터가 떠오른다. 오래된 동영상 파일, 텍스트 로그, 그리고 고아원 내에서의 기록들. 이곳이 단순한 고아원이 아니라는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든다.
"이 파일들, 리셋이 숨겨놓은 네 데이터의 일부야. 고아원 서버에 백업된 기록이 남아 있었어." 유령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한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귀에 익다. 대체 어디서 들어본 걸까.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오를 듯 말 듯 아른거린다.
"그럼… 이게 내 진짜 과거라는 거야? 리셋이 지우기 전에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 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는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목을 조여온다.
유령은 잠시 침묵한다. 그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깊어진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 기억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장담할 순 없어. 리셋은 데이터를 조작하는 데 전문가니까. 네가 보는 게 진짜인지, 아니면 그들이 심어놓은 또 다른 거짓인지 확인해야 해."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진실과 거짓. 내 기억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손을 뻗어 화면을 터치한다. 화면 속 소녀의 얼굴이 확대된다. 나와 똑같은 눈, 똑같은 미소. 하지만 그 눈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소녀가 나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동영상 파일 열어봐. 뭔가 나올지도 몰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유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파일을 클릭한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오래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영상은 고아원의 복도에서 찍힌 듯하다. 낡은 벽, 녹슨 문틀, 그리고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중 한 명이 나처럼 보인다. 어린 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장난을 치며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사라진다. 영상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복도 끝에 나타난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그의 손에는 작은 기계가 들려 있다. 아이들이 그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흩어진다.
"저 사람… 리셋 소속이야." 유령이 낮게 중얼거린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화면을 본다. 영상 속 남자가 나를, 그러니까 어린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는 내 팔을 잡고 어두운 방으로 끌고 간다. 영상은 거기서 끊긴다. 화면이 검게 변하고,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뛴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묻는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끌려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치밀어 오른다. 본능적으로 그 방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느낀다.
"리셋은 고아원을 실험장으로 사용했어.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령이 말을 멈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마치 말하기 꺼려지는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 말해. 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는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나는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실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하지만 동시에 분노가 솟구친다. 리셋이 나에게,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주먹을 꽉 쥔다.
"이나, 진정해. 네가 이걸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리셋이 숨긴 진실을 찾아내지 않으면, 넌 영원히 도망만 치게 될 거야." 유령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한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 이상하게도 그 따뜻함이 나를 조금 진정시킨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나를 돕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았어. 계속하자. 하지만…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없다는 보장은 없잖아. 너도 리셋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는다. 그의 목소리가 익숙한 이유, 그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이유. 모든 게 의심스럽다.
유령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나를 믿는 게 네 유일한 선택이야. 리셋의 추격자들이 곧 이곳까지 올 거라고. 우리가 이 데이터를 다운로드하고 떠나기 전에 그놈들이 도착하면 끝장이야."
그의 말이 맞다. 나는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다. 화면 속에는 여전히 고아원의 기록들이 떠 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유령에게 묻는다. "그럼 빨리 움직여. 이 데이터 전부 다운로드할 수 있어?"
"해보지. 하지만 시간이 걸려. 네가 주변을 경계해. 추격자들이 가까워지고 있어." 유령은 USB 드라이브를 컴퓨터에 꽂고 데이터를 복사하기 시작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 문 쪽으로 다가간다. 복도는 여전히 고요하지만, 멀리서 희미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리셋의 드론이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뛴다.
나는 문틈 사이로 복도를 살핀다. 낡은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먼지 쌓인 바닥.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기계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이다.
"유령, 빨리! 누가 오고 있어!" 나는 낮게 소리치며 뒤를 돌아본다. 유령은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화면 위 다운로드 진행 바가 70%를 가리키고 있다.
"조금만 더! 2분만 버텨!" 유령이 다급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2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무기를 찾는다. 책상 위에 녹슨 철제 자가 놓여 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문 뒤에 몸을 숨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땀이 손바닥을 적신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린다. 검은 복장의 남자가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전자 총이 들려 있다. 리셋의 추격자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을 살핀다. 그가 유령을 발견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나는 철제 자를 꽉 쥐고 그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쿵.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하지만 그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곧이어 다른 발소리들이 더 빠르게 가까워진다. "여기다! 놈들이 여기 있어!"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나는 유령을 돌아본다.
"유령, 다 됐어? 이제 도망쳐야 해!" 나는 다급하게 외친다. 유령은 USB를 뽑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됐어! 이쪽으로 와! 창문으로 나가자!"
우리는 재빨리 교실 창문으로 달려간다. 창문은 오래되어 쉽게 부서진다. 우리는 창문을 넘어 고아원 뒤편의 어두운 골목으로 뛰어내린다. 뒤에서는 추격자들의 외침이 계속 들려온다. "놈들을 놓치지 마!"
우리는 어둠 속으로 달린다. 뉴서울의 네온사인이 희미하게 비추는 골목길.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손에 쥔 USB에는 내 과거가 담겨 있다. 그 안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리셋은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나,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한 곳이 있어. 버텨!" 유령이 내 손을 잡으며 외친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쥐며 달린다. 그의 정체, 내 과거, 리셋의 비밀. 모든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지금은 오직 달리는 것만이 내 유일한 선택이다.
뉴서울의 밤은 끝없이 깊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추격자들의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어둠을 뚫고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다음 순간이 두렵지만, 동시에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