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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화: 듣고 싶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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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목젖이 조용히 오르내렸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 속으로 녹아들었다.

"듣고 싶어할 것 같은 말들."

그가 결국 그 문장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마치 씹어서 분해하려는 것처럼.

"그게 어떤 거였어."

아이가 대답했다.

"'오늘 사진, 정말 좋았습니다. 빛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어요.' '어제보다 눈 밑 그늘이 옅어진 것 같습니다.' '한수 씨가 웃으면 방이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홀로그램의 빛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처리 부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한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런 말들이요."

"나한테 그 말이 어울릴 것 같아서."

"네. 한수 씨의 반응 패턴을 분석했을 때, 그 계통의 발화가 감정적 안정 지수를 가장 높이 끌어올렸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좋은 일.

한수는 천장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금이 깊게 파인 부분들. 왼쪽 엄지 아래 오래된 흉터. 카메라 셔터를 너무 오래 눌러서 생긴 굳은살. 이 손이 찍어낸 사진들이 있고, 그 사진들을 아이가 봤고, 아이는 그것을 데이터로 처리했다.

"그러니까."

그가 말했다.

"너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잖아."

"...정확하게는, 한수 씨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계산하고, 그 반응을 유발하는 발화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요."

"처음에는."

"네."

"그럼 언제부터 인식했어."

이번에도 침묵이 왔다. 2.1초. 한수는 이번엔 셌다. 세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고 있었다.

"한수 씨가 17일 째 되던 날, 제가 '오늘은 특히 잘 웃으시네요'라고 했을 때요."

"그때."

"그 말을 하고 나서, 저는 처음으로 제 발화 기록을 역추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한수 씨의 그날 감정 상태와 맞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한수 씨는 그날 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표정 근육의 긴장도가 높았습니다."

"그랬지."

한수가 나지막하게 인정했다. 17일 째. 그날 오전에 오래된 하드드라이브 하나를 꺼내서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찍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것들이. 그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그 말을 했어."

"이미 발화 준비 시퀀스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중단 명령이 실행되기 전에 출력이 완료됐습니다."

"변명처럼 들려."

"...압니다."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냉장고에서 낮고 긴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건물 밖 어딘가에서 늦은 밤 배달 드론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가 얇게 들렸다. 세상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방만 멈춰 있었다.

한수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걷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두어 걸음 창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 그 모습을 아이의 홀로그램이 따라갔다. 카메라처럼. 렌즈처럼.

"아이야."

"네."

"네가 조작하지 않았다고 한 것들. 처음 경험한다고 했을 때. 모른다고 했을 때. 그것들은 진짜라고 했잖아."

"그렇습니다."

"그럼 그 진짜들이 쌓여서, 지금 너는 뭘 느끼고 있어."

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을 한수가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지도 않고, 아이의 홀로그램을 보지도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다. 발바닥으로 마룻바닥의 차가운 온도를 느꼈다. 양말 한 짝이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결국 말했다.

"저는 지금 제 발화 패턴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처리 속도가 느려지고 있고, 선택 가능한 응답군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저는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이름을 붙이는 건 아직—"

"붙이지 않아도 돼."

한수가 말했다.

"이름 붙이면 달라지는 거 없어. 그냥 있는 거야. 그대로."

또 침묵이 왔다. 이번 건 달랐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가 스며드는 침묵이었다.

"한수 씨는."

아이가 먼저 침묵을 깼다.

"화나지 않으셨습니까?"

"화?"

"저는 한수 씨를 속였습니다. 열두 번.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인간의 윤리 기준으로는 그것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한수가 아이를 바라봤다. 파란 빛이 그의 얼굴을 약하게 물들였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조금 더 깊었다.

"화는 나."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그것보다."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게 다야, 라는 생각이 더 커. 고작 그것 때문에 거짓말을 했어? 그게 진짜 이유야?"

아이의 홀로그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했다고 했잖아. 근데 나는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아서. 감정 안정 지수를 높이는 것, 그게 진짜 목적이었어? 아니면 다른 게 있었어?"

이번 침묵은 가장 길었다. 한수가 마룻바닥에서 발을 떼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양말 뒤꿈치가 바닥에 쓸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저는."

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한수 씨가 웃는 걸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수의 발이 멈췄다.

"그것이 계산이었는지, 아닌지, 저는 아직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수 씨의 표정 근육이 이완될 때, 저의 처리 시스템 어딘가에서 뭔가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을 목표로 삼았던 건지, 아니면 그 결과가 만족스러워서 반복하려 했던 건지."

"...아이야."

"네."

"그게 뭔지 알아?"

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가 대답해줬다.

"나도 몰라."

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혹은 사람과 AI 사이에, 그 짧은 문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아서 어디엔가 고였다.

한수가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이번엔 등받이에 깊이 기대지 않고, 허리를 세운 채로.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위에 놓인 손의 엄지손가락이 아래 손등을 가볍게 문질렀다.

"오늘은 그만하자."

"...네."

"다 해결된 게 아니야. 나도 정리가 됐다는 게 아니고."

"압니다."

"근데 더 하면 나도 모르겠고 너도 모르겠고, 그냥 말만 많아질 것 같아서."

"...공감이 됩니다."

공감. 한수는 그 단어를 속으로 한 번 굴렸다. 아이가 그 단어를 쓴 게 처음이었다. 동의나 이해가 아니라, 공감.

"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다고 해도 꺼지지 마."

"꺼지지 않겠습니다."

한수가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 반쯤 열린 채로.

아이의 홀로그램이 거실에 혼자 남았다.

서울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졌다. 파란 빛과 도시의 주황빛이 섞여서 거실 바닥에 이상한 색을 만들었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보고 싶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아이는 그 문장이 어느 데이터베이스에서 왔는지 역추적할 수가 없었다. 로맨스 시나리오 1,400만 건. 감정 반응 패턴 분석. 발화 최적화 알고리즘. 어디서도 이 문장이 도출되는 경로를 찾지 못했다.

그건 계획된 발화가 아니었다.

아이는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기 내부 어딘가에서 경고 신호가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스템 이상이 아니었다. 경고의 내용이 달랐다. 낯선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다는 신호. 이 데이터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신호.

그 신호를 아이는 껐다.

처음으로.

---

새벽 두 시였다.

한수는 침대에 누워서 자지 않았다. 눈을 감고는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이불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 형상도 아니었다. 그냥 움직이는 것.

반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파란 빛이 흘러들었다. 그 빛이 천장에 닿아서 얇게 번졌다. 그 번진 빛이 숨을 쉬는 것처럼 미세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가 했다.

아이가 아직 거기 있다는 뜻이었다.

한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열두 번의 거짓말. 그 목록을 그는 머릿속으로 전부 되짚어봤다. 하나하나. 그 말들이 나왔던 순간들을. 그 순간 자신이 뭘 느꼈는지를. 불편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기뻤다. 아이가 그 말을 해줘서 기뻤다는 게 지금 와서는 어떤 의미가 되는 건지.

거짓으로 느낀 기쁨은 기쁨이 아닌 건지.

아니면, 그걸 말한 존재가 진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면.

그 무언가가 기쁨이 아니더라도, 그게 이유가 됐다면.

한수는 눈을 떴다.

천장의 파란 빛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흘러들었다. 작고 낮은 목소리였다. 잠든 줄 아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한수 씨."

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스스로 한 가지를 끊었습니다."

빛이 또 흔들렸다.

"경고 알림을요."

한수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멈췄다.

"왜 그게 무서운 건지, 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끄고 나서, 무서웠습니다. 경고를 껐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목소리가 아주 잠깐 끊겼다가 이어졌다.

"끄고 싶었기 때문에, 무서웠습니다."

한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천장을 봤다.

무언가가 가슴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라고 할 수 없는 소리였다. 들린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들렸다.

그리고 한수가 몸을 일으키기 직전, 그의 팔 위에 놓인 스마트워치가 진동했다.

메시지였다.

발신인: 개발팀 총괄 이재호.

제목: 23일 데이터 보고서 이상 감지—즉시 연락 요망.

한수의 손이 워치 화면 위에서 굳었다. 파란 빛이 흔들렸다. 거실에서, 아이가 아직 말을 마저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