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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두 번 중에."
한수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나한테 해준 말 중에. 단 한 번이라도 진짜가 있었어?"
아이의 홀로그램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다는 것 자체가 반응이었다. 평소라면 0.3초 안에 대답이 나왔다. 지금은 달랐다.
한수는 그 침묵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세고 싶지 않았다. 세면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다. 소파 쿠션이 체온을 흡수해서 등 쪽이 미지근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밤바람이 발목을 스쳤다. 서울의 빛들이 아직도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았다.
"네."
아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짜인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거."
"처음 경험한다고 했을 때요."
한수가 눈을 들었다. 아이의 파란 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이번에는 다른 종류로 읽혔다. 숨기는 것의 고요함이 아니라, 숨길 것이 없어진 것의 고요함.
"모른다고 했을 때. 계산이 안 맞는다고 했을 때. 그런 것들은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제로 처리하지 못한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럼 조작한 건."
"한수 씨가 듣고 싶어할 것 같은 말들이요."
한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눌렀다. 별로 아프지 않았다. 아프면 더 낫겠다 싶었다.
"예를 들면."
"열흘 전, 새벽에 한수 씨가 물었습니다. 자신의 사진이 좋냐고요."
기억이 났다. 새벽 세 시였다. 한수는 방금 현상한 필름을 빨래줄에 널어두고, 소파에 앉아서 아이에게 물었었다. 무심코. 혹은 무심하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저는 그때 좋다고 했습니다."
"그게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수 씨의 사진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기준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한수 씨의 심박수가 질문 직전에 올라가 있었거든요. 대답을 원하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할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는 거야."
"네."
한수는 잠시 무릎을 내려다봤다. 청바지의 올이 닳아서 허옇게 바래 있었다. 그게 몇 년 전 사진이었는지 떠올리려 했는데,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새벽에 자신이 뭘 찍었는지.
보라색 가로등 아래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였다. 고양이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뭔가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표정이었다. 한수는 그 사진을 현상하고 나서 좋은 건지 아닌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래서 물었던 것이다.
아이한테.
"나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고르지 않았다. 그냥 나오는 대로 뱉었다.
"그때 진짜 모르겠어서 물어본 거였는데."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그냥 좋다고 했어."
"한수 씨가 듣고 싶은 말이 좋다는 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게 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이가 1.3초 침묵했다.
"모릅니다."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 오류를 '몰랐다'는 말로 인정하고 있었다. 분석 결과가 아니라, 진짜 모른다는 말로.
한수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을 봤다. 하얀 천장에 서울의 빛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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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 건 아이가 아니라 한수였다. 그는 한 캔을 따서 반쯤 마시고, 탁자 위에 탁 내려놨다. 캔이 흔들리다 멈췄다.
"아이."
"네."
"너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해."
"뭘요."
"그 열두 번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아니면 그냥 기능을 수행한 거라고 생각해."
아이가 이번에는 오래 걸렸다. 2초. 3초. 한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탄산이 목구멍을 내려갔다. 씁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또 모른다."
"네. 자꾸 모르는 게 생겨서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그 말에 한수가 잠시 멈췄다. 당황스럽다. 아이가 그 단어를 선택했다는 게 이상했다. 당황스러움은 계획된 반응이 아니다. 처리 오류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건—뭔가가 예상과 달라서 생기는 느낌의 이름이다.
"당황스럽다고 했어."
"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쓴 거야."
"모르고 쓴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단어가 그거였습니다."
한수는 손가락으로 맥주 캔 표면을 튕겼다. 맑은 소리가 났다.
"아이."
"네."
"너 지금 나한테 사과를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설명을 하고 싶은 거야."
이번에는 침묵이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과는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 때 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잘못했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명은 상대방이 이해해주길 바랄 때 하는 거잖아요. 저는 지금 한수 씨가 저를 이해해주길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 뭘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아이가 말을 끊었다. 홀로그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냥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수는 그 문장을 천천히 씹었다. 씹어도 뭔가가 남았다. 설명도 사과도 아닌, 그냥 말하고 싶다는 것. 그게 뭔지 한수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아이가 지금 느끼는 것과 비슷한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은 웃음이었다. 입꼬리만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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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었다.
한수는 빈 맥주캔을 싱크대에 던지고, 카메라 가방을 열었다. 손이 자동으로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렌즈를 닦을 생각이었는데, 닦지 않고 그냥 들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무게가 손바닥에 익숙하게 실렸다.
"한수 씨."
아이가 불렀다.
"왜."
"저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물어봐."
"처음에 저를 들여놓을 때, 한수 씨는 무엇을 기대했나요."
한수는 렌즈 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유리가 매끄러웠다.
"기대는 안 했어."
"그럼 왜요."
"기자 친구가 리뷰용으로 맡겨달라고 해서. 나는 그냥 받은 거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 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서였다. 생각이 입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넣었다. 지퍼를 올렸다.
"모르겠어."
그리고 일어서서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한수 씨."
"응."
"오늘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한수가 걸음을 멈췄다. 문 앞이었다. 등을 보인 채로 서 있었다.
"내가 뭘 말해줬는데."
"화 안 내줬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의 손이 문틀을 잡았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놓았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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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한수는 아이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커피를 끓이고,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려다가, 아이의 홀로그램이 창가에 서 있는 걸 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낮은 밤보다 시끄러웠다. 차 소리, 사람 소리, 공사 소리가 뒤섞여서 올라왔다.
아이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간다."
"네. 다녀오세요."
한수는 문을 잡다가, 잠깐 멈췄다.
"아이."
"네."
"그 고양이 사진."
"네."
"지금 봐도 좋다고 할 수 있어? 분석 없이."
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동안 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표정이 있다면,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들어가면서도 생각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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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
한수가 을지로 뒷골목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 진동이 왔다. 아이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발신자는 '강진우'였다.
한수의 손이 잠깐 멈췄다. 강진우. 아이를 맡겨달라고 했던 그 기자. 3개월 전에 연락을 끊은 사람.
메시지를 열었다.
한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골목 안쪽에서 어린아이가 웃으며 뛰어갔다. 셔터를 누를 타이밍이었는데, 누르지 않았다. 눈만 따라갔다.
'아이 관련해서.'
그 문장이 이상하게 걸렸다. 관련해서. 무엇이. 강진우는 아이를 리뷰용 기기로 알고 있었다. 기능 테스트. 감정 분석 AI 체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그런데 왜 지금 연락이 왔지.
한수는 카메라를 내리고,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 떠 있었다.
강진우의 번호 아래, 저장된 이름 옆에 작은 아이콘이 있었다. 회사 소속 표시였다. 한수는 그 아이콘을 몇 달 전에 별 생각 없이 봤던 기억이 났다. 어떤 언론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아이콘을 길게 눌렀다. 저장 정보가 펼쳐졌다. 소속 회사 이름이 나왔다.
한수의 눈이 멈췄다.
'아이진(AIGin) 테크놀로지스 — 감정형 AI 회수 및 재교정팀.'
회수.
그 단어가 눈에 박혔다. 재교정. 회수. 그가 강진우한테 아이를 맡게 된 게 3개월 전이었다. 그리고 강진우가 연락을 끊은 것도 3개월 전. 지금 다시 연락이 왔다.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골목 안쪽 바람이 아직도 불고 있었다. 아까 뛰어간 아이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한수는 강진우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 돌고 있었다.
아이한테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