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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화: 옮겨붙은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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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오셨군요, 황녀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레나’를.”

벨라스 백작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독은 내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었지만, 턱은 꼿꼿이 치켜들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나의 그림자 기사는 내 옆에서 검을 고쳐 잡았고, 그의 강철 같은 눈빛만이 이 절망적인 상황 속 유일한 아군임을 증명했다.

내 뒤, 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해독제가 온몸으로 퍼지며 독의 고통과 마력의 회복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쇠사슬이 채워진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원망과, 이 모든 상황을 향한 불타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레나라니. 감히 황족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군, 벨라스. 네놈의 불경은 가문 전체를 멸족시키고도 남을 죄다.”

내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울려 퍼졌다. 조금의 떨림도 허용하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 허세가 통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시간을 벌어야 했다.

벨라스 백작은 내 위협에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기름진 얼굴에 걸린 미소는 역겨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황족의 이름이라. 하하, 아직 모르시는군요. 전하의 그 이름은 제국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붉은 달을 섬기는 자들의 것이지요. 전하께서는 그저 운 좋게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비어있는 그릇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곧, 위대한 영혼을 담고 진정한 주인이 되실 테니, 영광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이 나를 훑었다. 마치 값비싼 가축의 상태를 살피는 듯한 그 시선에 속이 뒤틀렸다. 그릇. 계승자. 금서고에서 읽었던 내용이 현실이 되어 내 목을 조여왔다. 이 자들은 나, 레나라는 개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무언가를 담을 ‘레나’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다.

“헛소리.”

카엘이 으르렁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쇠사슬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섬뜩한 소리를 냈다.

“네놈들의 망상은 거기까지다, 벨라스. 그녀는 제국의 황녀 전하시다. 네놈들의 더러운 주술에 이용당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오, 로안의 늑대께선 아직도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주인에게 버려질 운명인 주제에.”

벨라스는 손짓했다. 병사들이 창끝을 우리에게 겨누며 한 걸음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숨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우리가 들어온 폐수로는 이미 막혔을 터. 이 지하 감옥의 구조를 알지 못하는 이상,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얌전히 따라오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카엘 경의 목숨을 담보로, 무모한 저항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벨라스의 시선이 카엘에게 향했다. 비열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전 생의 무력한 황녀가 아니라는 것을.

“카엘 경의 목숨?”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내게 있어 복수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의 목숨 따위로 나를 협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겠지.”

내 차가운 대답에 벨라스의 눈썹이 의아함으로 꿈틀거렸다. 카엘조차 상처받은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은 감정에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옆의 그림자 기사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저 자를 인질로 잡아. 단 3초면 돼.”

기사는 미동도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는 다시 벨라스를 향해 조소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희가 말하는 그 ‘레나’라는 그릇은 꽤 흥미롭군. 내가 너희의 주인이 되어준다면, 내게 무엇을 바칠 수 있지?”

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병사들이 술렁였다. 벨라스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오만한 미소를 되찾았다. 그는 내가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이 낡아빠진 제국이 아닌, 세상을 손에 넣게 되실 겁니다. 붉은 달의 가호 아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

내 외침과 동시에, 그림자 기사는 연기처럼 사라져 벨라스의 등 뒤에 나타났다. 번개 같은 속도였다. 그의 차가운 단검이 벨라스의 목에 닿았을 때, 벨라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경악이 들어찼다.

“모두 무기 버려! 당장!”

기사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 혼란을 틈타, 카엘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자신을 묶고 있던 쇠사슬의 반대편을 벽에서 뽑아냈다. 육중한 쇠사슬이 그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무기가 되어 번뜩였다. 그는 쇠사슬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 두 명을 단숨에 쓰러뜨렸다.

“이쪽입니다, 전하!”

카엘이 피를 토해내듯 외치며 어두운 복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이유 없이 그곳을 지목했을 리 없었다. 벨라스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이 쉭쉭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백작님을 구하라!”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우리는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렸다. 복도의 끝은 막다른 벽이었다. 절망이 엄습하려는 순간, 카엘이 벽의 특정 돌출부를 강하게 밀었다. 끼기긱,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벽의 일부가 회전하며 새로운 통로를 드러냈다. 비밀 통로였다. 그는 이 성의 구조를 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고,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완벽한 어둠과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내 멀어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엘 역시 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해독제를 마셨지만, 몸에 남은 독의 잔재와 무리한 움직임이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희미한 마석등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그림자 기사가 소리 없이 다가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복면 아래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다. 수고했다.”

짧은 대화가 오갔다. 나는 다시 카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벽에 기댄 채,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무거워 차라리 칼에 찔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로 낮게 잠겨 있었다.

“내 목숨을 구한 게 아니야. 나는 내 복수를 위해, 제국을 위해 당신이 필요한 것뿐이야.”

“그딴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째서… 약을 먹인 겁니까! 내 경고를 무시하고!”

그는 소리치듯 말하다가, 격한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를 한 줌 토해냈다. 나는 놀라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해독제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죽었어. 그리고 ‘표식’이라니, 그게 대체 뭐지?”

나는 참을성 있게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좁은 통로 안을 공허하게 울렸다.

“해독제… 맞습니다. 그건 ‘피의 눈물’을 해독하는 약이 맞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저주를 옮기는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주를… 옮겨?”

“벨라스 놈들이 사용한 독은 단순한 독이 아니오. 그것은 붉은 달의 주술이 걸린 ‘낙인’입니다. 그 독에 중독된 자는 죽는 순간, 영혼이 붉은 달에게 귀속되지. 하지만 그 전에 해독제를 마시면… 중독은 풀리지만, 낙인은 해독제를 마지막으로 마신 자에게로 옮겨갑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내가 그에게 한 짓은, 그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짊어지고 있던 저주를 내게로 가져온 것이었다. 황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여유롭게 내게 해독제를 건넸던 것일까. 나를 시험하는 동시에, 나에게 붉은 달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

“나는… 나는 그 낙인을 가지고 죽을 생각이었소. 내가 죽음으로써, 나와 붉은 달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내려 했단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 당신이 모든 것을 망쳤어.”

카엘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의 손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는 후회가 아닌, 나를 향한 지독한 염려와 완전한 절망이 담겨 있었다. 이전 생에서 나를 죽였던 그 차가운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불꽃처럼 뜨거운 감정이었다.

“이제 그들은 당신을 쫓을 겁니다. 이전보다 더 집요하게.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을 그릇으로만 보지 않아. 이미 낙인이 찍힌, 자신들의 소유물로 여길 테니까.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붉은 달은… 당신을 찾아낼 것이오.”

그의 마지막 말은 사형 선고처럼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복수를 위해, 제국을 위해 내디뎠던 나의 가장 대담했던 도박은, 나 자신을 거대한 감옥에 가두는 최악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우리가 들어온 비밀 통로의 문 쪽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돌이 긁히는 소리. 그리고 이내, 문의 틈새로 붉고 섬뜩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횃불 빛이 아니었다. 마치 피로 물든 달빛 같은, 기이하고 불길한 마력의 빛이었다.

카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젠장… 벌써 시작됐군. 낙인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오. 그건 길잡이이기도 하니까.”

붉은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빛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