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29화. 29화: 심장의 자격

이 에피소드는 오디오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너희 둘 중 하나가… 저 옥좌에 앉아, 이 탑의 새로운 ‘심장’이 되어야 한다.

에레보스의 마지막 말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쇠붙이가 되어, 고막을 찢고 들어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박혔다. 시간의 흐름이 멈췄다. 거대한 폐허 홀을 채운 것은 침묵이 아니었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진공의 절망이었다.

천장의 균열에서 돌가루 하나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제야 멈췄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헛소리.”

내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단어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런 이분법적인 선택지는 함정일 뿐이야. 언제나 제3의 길이 있기 마련이지.”

나는 옥좌에 묶인 노인을 쏘아보았다. 내 눈빛은 칼날이었다. 이 모든 비극을 설계한 자, 그가 제시하는 구원 따위 믿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은 생존을 위해 미친 듯이 회전했다. 이 탑의 시스템, 저주의 원리, 그리고 이 노인이 숨기고 있는 또 다른 진실. 그 안에 분명 해답이 있을 터였다.

“제3의 길?”

어둠 속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산발이 된 머리를 한 마리아가 부서진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광기 어린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델리아의 딸년답게 끝까지 오만하구나. 정원의 질서를 거스른 잡초에게는 선택지 따위 주어지지 않아. 오직 속죄만이 있을 뿐! 너희 중 하나가 저 옥좌에 앉아 영원히 고통받는 것, 그것이 현자님께서 베푸시는 유일한 자비다!”

그녀의 광신적인 외침이 폐허를 울렸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내가 하지.”

내 옆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카엘이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겨울 호수처럼 고요했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텅 빈 옥좌, 그가 걸어가야 할 무덤을 향해 있었다.

“안 돼.”

“이것이 내 속죄요.”

그가 내 말을 잘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오히려 그 결심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당신 말대로, 나는 검은 늑대였소. 내 분노로 수많은 내 부족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지. 내 어머니는 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지만,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수심에 눈이 멀었소. 이제라도… 그 빚을 갚아야지. 당신은 살아서 나가시오, 전하. 나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요.”

심장이 바닥 없는 늪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등이, 그 넓고 단단했던 등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차가운 갑옷의 감촉 아래, 그의 팔 근육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건 네 빚이 아니야. 이건 우리 모두의 저주야. 멋대로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하지만 자격이 있는 것은 나뿐이지.”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잿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희미한 균열이 스쳤다. 슬픔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어머니의 등에 새겨진 백도어는, 그분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오. 정원의 저주와 가장 닮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 피를 이어받은 것은 나뿐이니. 이 탑의 새로운 심장이 될 자격 역시, 나에게만 있을 터.”

그의 말은 논리적이었기에 더욱 잔인했다. 모든 것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부서져라 힘을 주었지만, 그의 결심을 단 1밀리미터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정말로…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할 셈이냐.”

옥좌에서, 에레보스의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카엘의 단호한 등을 지나,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네 대답은 무엇이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카엘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에레보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당신은 모든 걸 말하지 않았으니까.”

홀 전체가 다시 한번 기분 나쁘게 진동했다. 천장에서 이번에는 제법 큰 돌덩이가 떨어져 내리며, 우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무엇을 더 알고 싶은 게냐, 소녀여. 운명은 이미 정해졌거늘.”

“‘세상의 눈물’이 대체 뭐지? 단순한 동력원이라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터. 마력이 강한 마석이라든가, 다른 생명체라든가. 왜 하필 우리 둘 중 하나여야만 하는 거지? 이 저주의 근원이라는 것의 정체가 뭐냐고!”

내 외침에, 에레보스는 길게 침묵했다. 그는 마치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는 듯, 흐릿한 눈을 감았다. 마리아조차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희미해져, 마치 바람 소리에 섞여 흩어지는 듯했다.

“저것은… 심장석이 아니다. 저것은 기억이다.”

“기억?”

“초대 황제가 ‘정원’을 만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 제국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던 그 마음을 통째로 뽑아내어 저주 시스템의 핵으로 삼았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눈물’의 정체지. 저주가 제국을 지키는 방향으로만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어. 하지만 그의 영생에 대한 탐욕이 그 순수한 기억마저 오염시켰고, 저주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에레보스는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시스템은 언제나 자신의 근원과 가장 유사한 것을 새로운 핵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순수한 마음’. ‘희생 정신’. ‘무언가를 지키려는 의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기억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바로 저 아이의 마음뿐이구나.”

그의 시선이 다시 카엘에게 닿았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었지. 위대한 정원은 가장 순수한 희생을 양분으로 삼아 그 질서를 유지하는 법….”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자격이 없는 건가? 복수심에 불타는 나, 내 목숨을 위해 남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나, 내 어머니마저 의심하고 증오했던 나는… 저 ‘순수한 마음’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시스템이 나를 거부하는 것인가.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에레보스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아니.”

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신은 또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 말에 카엘과 마리아, 그리고 에레보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집중되었다.

“순수한 마음이 자격이라면, 내 어머니 아델리아는 왜 ‘세상의 눈물’을 훔치려 했지? 그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아서 시스템이 그녀를 거부했던 건가? 아니. 당신도 말했잖아. 그녀는 저주를 끝낼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강한 희생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그녀는 실패했지?”

에레보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더 확실한 긍정이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화상 입은 오른손의 통증이 다시 심장을 찌르는 듯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격의 기준은 순수함 따위가 아니야. 다른 무언가가 있어. 시스템이 나를, 그리고 내 어머니를 거부하는 진짜 이유. 그게 뭐지? 말해!”

쿠르르르릉-!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진동이 탑 전체를 뒤흔들었다. 홀의 절반에 가까운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엘이 반사적으로 나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자욱한 먼지바람이 우리를 덮쳤다.

“젠장! 시간이 없어!”

카엘이 외쳤다. 우리는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홀의 모습은 더욱 처참해져 있었다. 에레보스가 앉은 옥좌 주위만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해! 마지막 진실을 말하라고, 에레보스!”

내 절규에,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체념과 함께, 아주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아델리아는…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지. 저주를 멈출 방법을. 나는 그녀에게 ‘세상의 눈물’을 대체할 새로운 심장이 되는 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을 거부했다. 대신, 그녀는 훨씬 더 위험하고… 대담한 방법을 선택했지.”

에레보스의 시선이 내 쇄골 아래를 꿰뚫는 듯했다.

“그녀는 저주를 지배하는 것을 넘어, 저주 그 자체를 파괴하려 했다.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저주를 안에서부터 파괴하는 ‘독’을 만들려 했지. 그리고 그 독의 씨앗을… 자신의 딸인 너의 영혼에 심었다. 그것이 네 쇄골 아래에 새겨진 낙인의 정체다.”

***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독의 씨앗. 내 어머니가, 내 영혼에.

귀가 먹먹해지고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레아의 등에 저주식을 새기던 어머니의 모습, 내 존재가 실수라고 속삭이던 환영. 그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끔찍한 진실로 완성되었다. 나는 희망이 아니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저주를 파괴하기 위해 심어놓은, 살아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래서… 시스템이 나를 거부하는 거였군.”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 들렸다.

“몸 안에 독을 품은 자는, 심장이 될 수 없으니까.”

에레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무슨… 이 무슨 끔찍한….”

내 옆에서, 카엘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나를, 내 쇄골을,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내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희생에 대한 결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자의 깊은 충격과, 나를 향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연민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 저주를 멈출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처음부터 카엘, 그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를 이곳까지 이끌기 위한 미끼이자, 마지막 순간에 버려져야 할 불량품에 불과했다.

“하! 하하하!”

그때, 마리아의 미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무너진 잔해 더미 속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광소했다.

“꼴좋다! 결국 네년은 네 어미에게마저 이용당한 실패작이었어! 독을 품은 그릇 따위가 감히 정원을 넘보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 결말인가!”

그녀의 조롱이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지만, 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내 모든 감각은 마비된 상태였다.

“이제 모든 놀이는 끝났다. 배신자의 아들아!”

마리아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에레보스의 옥좌 옆 제단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표는 ‘세상의 눈물’이었다.

“네놈이 심장이 되어 이 정화를 완성하는 고귀한 영광을 누리게 두진 않겠어! 그전에, 내가 이 오염된 근원 자체를 파괴하여,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릴 테니! 모두 함께 죽는 거다!”

그녀의 눈은 진정한 광기로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시스템의 관리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신전 그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광신도였다.

그녀의 손이 푸르게 빛나는 ‘세상의 눈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안 돼!”

에레보스가 절규했다. 저것이 파괴되면, 탑의 붕괴가 아니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이 산맥 전체가 날아갈 터였다.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났다.

마리아의 손끝이 수정 심장에 닿기 직전.

내 옆에 있던 카엘이 움직였다. 그는 나를 향해 단 한마디를 남겼다.

“미안하오.”

그리고 그는 나를 거칠게 밀쳐냈다.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가 나를 밀어낸 그 반동을 이용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목표는 마리아가 아니었다. 그는 마리아를 지나쳐, 그녀보다 먼저 그곳에 도달하려 했다.

텅 빈 옥좌. 새로운 심장이 앉아야 할 바로 그 자리로.

그의 등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등지고 텅 빈 옥좌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