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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필름처럼 늘어났다.
카엘의 손에서 내던져진 내 몸이 허공의 정점에 도달하는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졌다. 아래에서 절규하는 카엘의 목소리도, 이 모든 비극을 지휘하며 비웃는 마리아의 조소도, 핏빛 악몽들이 내지르는 무형의 아우성도 모두 희미해졌다. 오직 내 머리 위에서 거대한 종양처럼 맥동하는 붉은 심장, 그 불길한 고동 소리만이 내 온 신경을 지배했다.
쿵. 쿵. 쿵.
그것은 내 심장 소리와 공명하며, 내 안의 가장 깊은 절망을 끄집어내려 했다. 네 존재는 실수라고 속삭이던 어머니의 환영, 너 때문에 우리가 죽었다고 원망하던 늑대 전사들의 얼굴이 붉은 빛 속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덜너덜하게 타들어 간 오른손을 뻗었다. 끔찍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와 뇌수를 태울 듯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 통증을 무시했다. 통증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쇄골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낙인에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부서져라.
그것은 입 밖으로 낸 명령이 아니었다. 내 영혼 전체를 실어 보낸, 저주에 맞서는 또 다른 저주였다. 거짓된 믿음, 뒤틀린 진실, 교묘한 악의로 쌓아 올린 이 가증스러운 하늘과 함께, 전부 사라져 버려.
내 손끝에서부터, 빛이 아닌 어둠이 피어올랐다. 심장석을 파괴했던 그 공허한 무(無)의 힘이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잉크 방울처럼 번져나가, 내가 가리킨 이름 모를 별자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치밀하게 돌아가던 이 공간의 법칙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겨났다.
삐걱, 하는 불협화음이 온 공간에 울려 퍼졌다. 붉게 빛나던 별들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짜놓은 완벽한 악보 위에서, 내가 엉뚱한 음표를 눌러버린 것이다.
“네년이 감히…!”
마리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우아한 미소가 사라졌다.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진 그 얼굴이 내게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균열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내가 찍은 작은 점 하나에서부터, 검은 거미줄 같은 금이 온 하늘로 뻗어 나갔다. 붉은 심장은 목표를 잃은 채 허공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나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의식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내 시야에, 붉은 심장이 마침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폭발음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장의 유리가 한꺼번에 깨져나가는 듯한, 소리 없는 파열음. 그것은 고막이 아니라 영혼으로 듣는 굉음이었다. 붉은 빛의 파편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닿는 모든 망령들을 먼지처럼 소멸시켰다.
온 세상에서 색이 사라졌다. 핏빛 하늘도, 칠흑 같은 바닥도, 그 위에 아른거리던 모든 악몽들도,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퇴색하며 허물어져 내렸다.
“안 돼…! 네까짓 게 감히 현자님의 정원을!”
마리아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를 받아내기 위해 달려오는 카엘의 흐릿한 형상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가장 먼저 나를 깨운 것은 냄새였다.
피비린내도, 달콤한 라일락 향기도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빛이 들지 않은 지하실에서 나는 듯한, 차갑고 메마른 먼지 냄새와 돌이 풍화되는 냄새. 그 냄새에 코끝이 시큰거려, 저절로 눈이 떠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별이 빛나는 하늘이 아니었다. 거대한 균열이 흉터처럼 나 있는, 거무죽죽한 돌로 된 돔형 천장이었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저 위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 덕분에 주변의 윤곽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있던 곳은 거대한 원형 홀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환상 속의 아름다운 천체관이 아니었다. 기둥들은 대부분 부서져 내렸고, 바닥은 정교한 흑요석이 아닌 울퉁불퉁한 현무암으로 되어 있었다. 수백 년은 족히 방치된 듯한, 거대한 폐허. 이것이 탑의 꼭대기의 진짜 모습이었다.
“……정신이 드시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엘이 부서진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엉망이었고, 입가에는 마른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 역시 멀쩡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오른팔에서부터 시작된 격통에 신음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내 오른손은 엉망이었다. 화상 위에 무리한 힘을 쓴 탓에, 살갗은 찢어지고 검붉게 변해 있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몰라.”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리며 기둥을 짚었다. 내부의 장기 어딘가가 손상된 듯했다.
“살아… 있군.”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카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지독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처참한 꼴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악몽에서 함께 살아남았다는, 기묘한 유대감이 폐허의 차가운 공기를 희미하게 데웠다.
“마리아는?”
내가 물었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그때였다. 홀의 반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증오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년들 때문에…! 네년들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어!”
마리아였다. 그녀는 더 이상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부드럽게 빛나던 밤색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 엉겨 붙어 있었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잔해 더미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던 흑요석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 하지만 그 지팡이 역시 중앙에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이 공간의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그녀 자신과 그녀의 무기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완벽한 무덤지기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잃고 분노만 남은, 패배한 개처럼 보였다.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아델리아의 망령이! 죽어서까지 이 정원을 더럽히다니!”
그녀는 지팡이를 나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지팡이 끝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현되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몇 번 더 지팡이를 휘둘러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카엘이 내 팔을 부축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혼자 힘으로 똑바로 섰다.
“이제 네 장난감은 다 부서진 모양이군, 마리아.”
내 조롱에, 그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닥쳐! 이 모든 건 잠시일 뿐이야! 현자님께서 이 탑을 복구하시면, 너희는 지금보다 더 끔찍한 악몽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거다!”
“그 현자라는 작자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하지만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도 숨어 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이 폐허와도 같았다. 수백 년 묵은 먼지처럼 버석거렸고, 마른 잎사귀가 부서지는 것처럼 공허했다. 목소리는 홀의 정중앙,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거대한 옥좌가 있는 방향에서 들려왔다.
나와 카엘, 그리고 마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옥좌는 탑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거의 부서져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 옥좌 위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다기보다는 쇠락한 옥좌의 일부처럼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길게 자란 백발과 수염은 그의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었고, 누더기가 된 로브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미라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물리적인 쇠사슬이 아닌, 희미하게 빛나는 마력의 사슬이 채워져 옥좌에 그를 결박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현자님…! 어찌… 봉인에서…!”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지 쌓인 수염 사이로, 아주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듯한, 흐리고 깊은 눈동자가 우리를 향했다.
“너희가… 거짓된 하늘의 심장을 부순 덕분에… 나를 옭아매던 사슬이 아주 잠시, 약해졌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희미해서, 한 단어 한 단어가 겨우 허공에 형태를 맺었다.
“나는 현자가 아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마리아를 지나, 나와 카엘에게로 향했다.
“나는 이 탑의 첫 번째 죄수일 뿐.”
***
“죄수…라고?”
카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단검 손잡이를 굳게 쥐고 있었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의 모든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듯했다.
마리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노인을 향해 거의 비명을 질렀다.
“헛소리 마, 배신자! 현자님의 위대한 계획을 더럽힌 최초의 오점 주제에! 네놈은 영원히 이곳에서 속죄해야 할 죄수일 뿐이야!”
노인은 마리아의 발악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나와 카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흐릿한 눈동자 속에서, 나는 수백 년의 세월과 지독한 고독의 무게를 보았다.
“아델리아의 딸이로구나….”
노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가 내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레아의 아들이고…. 그 두 사람이 남긴 마지막 불씨가… 마침내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당신은 대체 누구지? 내 어머니와… 카엘의 어머니를 아는 건가?”
내가 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모든 진실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자. 그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내 이름은 에레보스. 사람들은 나를 침묵의 현자라 불렀지…. 내가 이 탑을 세웠고, 초대 황제와 함께 ‘정원의 저주’를 설계한 장본인이니까.”
그의 고백은 폭탄과도 같았다. 저주의 창시자. 모든 비극의 시작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의 다음 말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저주를 통제하려 했을 뿐, 그것을 무기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초대 황제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저주에 손을 대면서부터였지. 나는 그를 막으려다 실패했고, 그가 죽기 직전 만든 이 탑의 시스템에 의해 영원히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빛나는 족쇄가 채워진 자신의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멋대로 해석하여 시스템을 관리하는 저 인형이, 나의 이름으로 새로운 현자가 되었지.”
에레보스는 턱짓으로 마리아를 가리켰다. 인형. 무덤지기. 시스템의 관리자. 그녀는 현자의 의지가 아니라, 현자를 가둔 감옥의 간수였던 것이다.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야!”
마리아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현자님의 위대한 뜻은 정원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 너희 어미들 같은 잡초를 제거하고…!”
“아델리아는 잡초가 아니었다!”
에레보스가 처음으로 감정을 담아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는 폐허가 된 홀 전체를 울렸다.
“그녀는 이 저주를 끝낼 유일한 희망이었다! 레아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저주를 파괴하려 한 게 아니야.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대신, 그들은 저주를 ‘하이재킹’하여, 그 통제권을 시스템에서 빼앗아 오려 했다! 레아의 등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저주식이 아니야. 그것은 이 탑의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백도어(Backdoor)였다!”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 저주로 저주를 지배한다. 어머니와 레아는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대담한 방식으로, 이 거대한 시스템에 반기를 든 혁명가였다.
“그리고 그 백도어의 마지막 열쇠가… 바로 네 안에 있다, 아델리아의 딸.”
에레보스의 시선이 내 쇄골 아래의 낙인에 닿았다.
“이제… 시간이 없구나. 심장이 파괴된 탑은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폐허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너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의 말대로, 홀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천장의 균열에서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선택이라니? 무슨 선택을 말하는 거지?”
카엘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에레보스는 옥좌 옆, 먼지 쌓인 제단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수정 심장이 놓여 있었다.
“저것이 바로 ‘세상의 눈물’. 이 탑과 정원의 저주, 그 모든 시스템의 근원(Source)이다. 아델리아가 훔치려다 실패했던 바로 그것이지. 하지만 지금 저것을 그냥 가져가면, 동력원을 잃은 탑은 즉시 폭발하며 너희와 함께 산산조각 날 거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에레보스의 흐릿한 눈이 나와 카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저주를 지배하기 위한 열쇠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붕괴를 멈추고 ‘세상의 눈물’을 안전하게 빼내기 위해서는… 탑에 새로운 동력원을 공급해야만 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다음 말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너희 둘 중 하나가… 저 옥좌에 앉아, 이 탑의 새로운 ‘심장’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