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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먼저 알아보았다.
이성이 그 가능성을 비웃고, 얼어붙은 뇌가 현실을 부정하는 동안에도, 내 심장은 제멋대로 날뛰며 그 목소리에 화답했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뼛속을, 영혼을 직접 울리는 그리움의 파동. 쇄골 아래의 낙인이 차갑게 타오르며 그 목소리를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릴리아….’
나는 숨을 멈췄다. 폐부의 마지막 공기 한 점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손에 쥔 흑요석이 용암처럼 뜨거워졌지만, 그 고통마저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무엇도, 지금 내 영혼을 흔드는 이 목소리보다 더 현실적일 수는 없었다.
‘내 가엾은 아가….’
다정하고, 따스하며,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들던 목소리.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악몽을 꾸고 울며 깨어났을 때마다 나를 끌어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나의 어머니, 선황후 아델리아의 목소리였다.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나는 차라리 내 모든 기억과 이성이 틀렸기를 바랐다.
“어머니…?”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목소리가 아닌, 갈라진 바람 소리에 가까웠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 대신, 하나의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안심하라는 듯, 나를 감싸는 따스한 온기. 그것은 의심과 공포로 얼어붙었던 내 마음의 성벽을 녹여내리는 봄볕과도 같았다. 붉은 달이 꾸며낸 환상일까? 내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비열한 함정?
‘두려워 마라, 나의 빛.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내 의심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표식은 저주가 아니야. 그것은 원래 우리 가문에 흐르던 힘이란다. 붉은 달의 어리석은 자들이 그 힘을 더럽히고 빼앗으려 했을 뿐. 이제 네가 진정한 주인이 되었으니, 그 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힘이라고? 이 끔찍한 족쇄가? 목소리는 내 혼란을 비웃듯, 하나의 장면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 내가 어렸을 적, 정원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던 날의 기억이었다. 피가 흐르는 상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내게, 어머니는 다가와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속삭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상처의 피가 멎고 통증이 사라졌었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는데.
‘기억나니? 그것이 바로 우리 혈통의 힘, 생명을 다스리는 권능이란다. 네가 지금 느끼는 고통과 혼란은, 그 힘이 너의 그릇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받아들이렴. 그것을 너의 일부로 인정하는 순간, 너는 비로소 진정한 너 자신이 될 수 있을 게다.’
어머니의 속삭임은 독처럼 달콤했다. 그것은 내 모든 불안을 잠재우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의 복수를 완성할 수 있는 힘.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절대적인 능력. 나는 홀린 듯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늑대들은 저주를 푼다고 널 제물로 삼으려 하겠지. 어리석은 자들. 저들은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가두고 있는 자물쇠를 부수려 하고 있단다. ‘정원의 저주’는 본래 이 땅의 생명력을 가두어 우리 가문의 힘을 키우기 위한 장치였어. 그것을 푼다는 것은, 곧 우리 가문의 힘을 대지에 흩어버리겠다는 뜻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들의 시험에 응하렴. 그들이 너를 ‘선조의 동굴’로 이끌 게다.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저주를 머금은 심장석이 있지. 그들은 네가 그 돌을 정화하길 바라겠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돼. 오히려 반대로, 너의 몸에 깃든 힘을 이용해 그 돌에 담긴 저주를 활성화시키는 거다. 그러면 저주는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에게 흡수되어 온전히 너의 힘이 될 게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제국을 바로 세울 너만의 힘이.’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이기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카엘은… 그는 저주를 막으려….’
‘그 아이를 믿지 마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아이의 어미가 바로 우리 가문의 힘을 시기해 ‘정원의 저주’를 망가뜨린 배신자란다. 그 아이 역시 제 어미의 피를 이어받았지. 너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에는 너의 힘을 빼앗고 제 부족의 원한을 풀려 할 뿐이야. 기억하렴, 릴리아. 이 세상에서 네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너 자신과, 네 안에 잠든 우리의 힘뿐이란다.’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의 존재는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쇄골의 열기도 가라앉았다. 나는 차가운 현실 속에 홀로 남겨졌다. 손에 쥔 흑요석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방금 전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남긴 말들은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카엘이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노파의 약초가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조금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상태는 위중했다.
“전하….”
그가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말없이 물주머니를 그의 입술에 대어주었다. 그는 몇 모금 힘겹게 물을 마시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그들의 천막이군. 어떻게….”
“당신이 열에 들떠 중얼거렸던 ‘밤안개 숲의 약속’ 덕분이지.”
내 메마른 대답에, 그의 잿빛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어머니의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그가 작게 읊조렸다. 나는 차갑게 물었다.
“당신의 어머니는 배신자인가?”
내 직설적인 질문에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는 상처의 고통도 잊은 듯,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부족을 사랑하셨소. 하지만 그분은 아셨던 거지. ‘정원의 저주’의 진실을. 그 저주는 푸는 것이 아니라, 막아야만 하는 재앙이라는 것을. 그것은 생명력을 모으는 장치가 아니오. 오히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여, 단 하나의 그릇을 채우기 위한 끔찍한 제단이지.”
“그릇?”
“바로… ‘레나’라고 불리는 존재. 당신 말이오, 전하.”
그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했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야기였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죽었지만 내 혈육인 어머니인가, 아니면 나를 죽였지만 지금은 나를 돕고 있는 원수인가.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울프가르는 어머니가 약속을 어기고 도망쳤다고 했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 어머니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원의 저주’가 완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했던 것이오. 하지만 그분은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지. 그리고 깨달은 거요. 자신 한 명의 희생으로는 저주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저주는 더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바로잡아야만 했소. 그래서 그분은… 황실로 향했던 것이오. 저주를 안에서부터 파괴하기 위해.”
그의 고백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선황후가 사실은 북방 부족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황제와의 만남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거대한 음모를 막기 위한 사투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럼 당신은….”
“나는 어머니의 유지를 잇고 있을 뿐이오. 당신을… ‘레나’라는 끔찍한 운명에서 구해내고, 이 제국을 좀먹는 저주를 끝장내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안에는 어떠한 거짓도, 기만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지독한 사명감과… 나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연민만이 가득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머릿속에서는 어머니의 달콤한 속삭임이, 눈앞에서는 카엘의 절박한 진실이 서로 충돌하며 나를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때, 천막이 거칠게 열리며 울프가르와 그의 전사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시선은 경멸스럽게 카엘을 훑고는, 내게로 향했다.
“밤새 생각은 정리되었나, 황녀? 네 목숨 값을 할 만한 대답을 찾았느냐는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엘의 말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뒤섞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당신들의 시험에 응하겠어.”
내 대답에 울프가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현명한 선택이다. 네가 진정 저주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 우리 부족의 선조들께서 직접 판단하실 게다.”
***
‘선조의 동굴’은 야영지에서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산맥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는 거대한 바위들 사이에 가려져,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동굴 안은 바깥의 혹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을 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벽과 천장에서는 날카로운 고드름이 이빨처럼 돋아나 있었고, 전사들이 든 횃불 빛이 그 위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나는 울프가르와 그의 전사들, 그리고 노파 주술사에게 둘러싸여 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카엘은 부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입구에 남겨졌지만, 나는 그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불안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동굴의 끝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 중앙에는 제단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고, 그 위에 심장만 한 크기의 검붉은 수정이 놓여 있었다. 수정은 희미하게 맥동하며,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심장석’이었다.
“저것이 우리 부족을 옭아맨 ‘정원의 저주’의 근원이다.”
울프가르가 으르렁거렸다.
“우리 부족의 가장 위대한 선조들만이 저 돌에 손을 대고, 그 힘을 잠재울 수 있었지. 하지만 이십 년 전, 레아의 배신 이후로 그 누구도 저 돌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다.”
노파 주술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했다.
“황실의 딸이여, 네 몸에 흐르는 힘으로 저 돌을 어루만져라. 네가 진정한 주인이라면, 돌은 너의 의지에 복종하여 그 흉포함을 거둘 것이고, 네가 가짜라면, 돌은 네 영혼을 산산조각 내어 제 양분으로 삼을 게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천천히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석의 맥동이 내 쇄골의 낙인과 공명하며 머리를 울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다시 속삭였다.
‘그래, 잘하고 있단다, 내 아가. 저 돌에 손을 대렴. 그리고 네 안의 힘을 해방하는 거야. 저주를 네 것으로 만들어라!’
카엘의 경고 또한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전하! 절대 그 힘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제단 앞에 섰다. 차갑고 불길한 기운이 피부를 찔렀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검붉은 심장석을 향해 뻗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무엇이 진실일까.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나 자신의 선택을 믿을 뿐.
나는 어머니의 방식도, 카엘의 방식도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힘을 흡수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그저 낙인의 힘을 이용해 저주를 ‘지배’하는 것.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내 손끝이 마침내 심장석에 닿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꿰뚫는 듯한 끔찍한 격통과 함께, 돌에서부터 검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내 팔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내 영혼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거짓이었다. 이것은 힘의 흡수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잠식이었다!
“크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려 했지만, 마치 강력한 자석에 붙들린 것처럼 손이 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쇄골의 낙인이 미친 듯이 타오르며 붉은빛을 토해냈다.
‘어리석은 것. 감히 이 몸을 지배하려 들어?’
내 머릿속에서 울린 것은 더 이상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원혼이 뒤섞인 듯한, 차갑고 오만한 괴물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처음부터 나를 속여, 스스로 제물이 되도록 유인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돌이 폭주한다!”
울프가르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동굴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천장에서 고드름과 돌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내 안의 모든 정신력을 끌어모아 역류하는 저주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내 의식의 마지막 끈이 끊어지려는 찰나, 나는 보았다. 동굴 입구에서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카엘의 모습을. 그의 잿빛 눈동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석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거기서 터져 나온 것은 더 이상 기운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의 검고 날카로운 가시 형태를 띤 순수한 악의 덩어리였다.
그 검은 가시들은, 나를 지나쳐 내 뒤에 쓰러진 카엘의 심장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