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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그 한 단어가 얼어붙은 대기 중에 낙인처럼 찍혔다. 살을 에는 북부의 칼바람도 그 단어만큼 날카롭지는 못했다. 울프가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래였고, 판결이었으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내 옆에서, 카엘의 몸이 무너지기 직전의 성벽처럼 위태롭게 휘청였다. 그의 입술 사이로 밭은 숨과 함께 억눌린 분노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울프가르에게 닿기도 전에, 그를 둘러싼 늑대들의 창날에 가로막힐 터였다. 그의 무력함은 곧 나의 무력함이었다.
나는 어깨를 꿰뚫는 고통도, 얼어붙은 발가락의 감각도 잊었다. 뇌수가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갑게 식었다. 공포에 질식하는 대신, 나는 분노를 연료 삼아 사고를 가속했다. 제물? 정원의 저주? 이 야만인들의 손에 내 목숨을, 내 복수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물이라.”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오히려 조소에 가까운 어조였다. 내 반응이 예상과 달랐는지, 울프가르의 털가죽처럼 덥수룩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를 둘러싼 전사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게 너희가 손님을 맞는 방식인가? ‘밤안개 숲의 약속’은 고작 계집 하나의 목숨 값으로 전락한 모양이군.”
“입 조심해라, 남부 계집.”
내 옆에 섰던 흉터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창끝을 내 목으로 겨눴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직 울프가르의 눈을 꿰뚫어 볼 듯이 응시했다. 지금 기 싸움에서 밀리면, 나는 정말로 저들의 제단 위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약속은 약속.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상대가 자격이 있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울프가르가 손을 들어 흉터 남자를 제지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내 찢어진 드레스 틈으로 보이는 붉은 낙인에 머물렀다. 그 눈은 호기심과 경멸,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로 번들거렸다.
“네 몸에 깃든 것은 우리 부족을 좀먹는 저주의 근원과 닿아있다. 그것을 이용해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네깟 황녀의 목숨 하나쯤은 아깝지 않은 거래지.”
“내가 죽는다고 저주가 풀릴 거라 확신하나?”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창날이 내 목에 닿기 직전에 멈춰 섰다. 차가운 강철의 냉기가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다.
“너희는 저주의 ‘근원’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무지한 분노를 풀어낼 ‘희생양’이 필요한 건가. 만약 전자라면, 나를 죽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을 텐데.”
내 도발적인 언사에 울프가르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는 피와 짐승의 털, 그리고 오래된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네년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적어도 당신들보다는 더 많이. 나는 이 표식을 품고 있는 ‘주인’이니까. 이건 단순한 낙인이 아니야. 길이고, 문이다. 내가 죽으면 문은 영원히 닫혀버릴 테고, 너희는 저주의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겠지. 진정한 해답은 눈앞에서 놓친 채로.”
내 말은 전부 허세였고, 즉흥적인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내 도박이 통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저주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의 무지가, 지금 나의 유일한 무기였다.
울프가르는 한참 동안 나를 꿰뚫어 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마침내, 그는 경멸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물러섰다.
“말만 번지르르하군. 좋다. 네년의 혓바닥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주지.”
그는 턱짓으로 자신의 거대한 천막을 가리켰다.
“끌고 와라. 저 반쪽짜리 늑대 새끼도 같이.”
***
울프가르의 천막은 바깥의 혹한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후끈했다. 중앙의 거대한 화덕에서 장작이 굉음을 내며 타올랐고, 바닥에는 두꺼운 곰 가죽이 여러 겹 깔려 있었다. 벽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짐승의 머리 박제와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걸려, 이곳 주인의 야만적인 권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나는 화덕 앞에 던져지듯 무릎을 꿇었다. 카엘은 내 옆에 거의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흉터 남자가 그의 상처를 살피는 척 거칠게 몸을 뒤집자, 카엘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피가 배어 나온 붕대가 끔찍했다.
“그만둬.”
내 차가운 목소리에 남자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울프가르는 천막 중앙의 거대한 의자에 짐승처럼 몸을 묻은 채,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어엿한 손님에게 너무 무례하군.”
“손님? 제 발로 제단에 걸어 들어온 제물이, 손님 행세인가.”
울프가르가 기름진 고기 한 점을 입에 던져 넣고 우적거리며 말했다.
“네년 말대로라면, 네년은 저주의 문을 열 열쇠를 가졌다는 소리렷다. 하지만 열쇠가 스스로 문을 열 리는 없지. 자물쇠를 부수는 것보다야, 열쇠를 억지로 돌리는 편이 훨씬 수월하지 않겠나?”
“억지로 돌린 열쇠는 부러지기 마련이지. 문도, 열쇠도 전부 망가진 채로.”
나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정원의 저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해. 그럼 나도 내가 아는 것을 말해주지. 이건 거래야.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내 당돌함에 울프가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관찰했다. 마치 흥미로운 벌레를 발견한 학자처럼.
“좋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원의 저주’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 내려온 역병이다. 십 년에 한 번, 붉은 달이 뜨는 해가 오면, 우리 부족의 아이들이 원인 모를 시름시름 앓다 죽어나가지. 마치 땅의 정기가 전부 말라버린 꽃처럼. 우리 주술사들은 그 저주가 남쪽, 너희 제국의 심장부에서부터 흘러들어온다고 했다. 정확히는, 황실의 비밀스러운 ‘정원’에서부터.”
황실의 정원. 어머니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그리고 내가 회귀하기 전 반역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이십 년 전, 그 저주는 가장 끔찍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그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사산되었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때, 한 여자가 나타났다. 네년 어미의 펜던트를 가지고, 네년처럼 건방진 눈을 한 채로.”
울프가르의 시선이 내 옆에 쓰러진 카엘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는 증오와 연민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저주를 약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밤안개 숲의 약속’이다. 하지만 그 계집은 약속을 어기고, 제국의 개와 눈이 맞아 도망쳤지. 그 대가로 우리 부족은 지난 이십 년간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그 배신자의 이름이 바로, 저놈의 어미인 ‘레아’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카엘의 어머니. 회색 늑대 부족의 일원이었던 그녀가, 자신의 부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려 했다고. 그리고 그 약속을 어기고 도망친 대가가 바로 이 ‘정원의 저주’의 심화였다. 카엘이 짊어진 운명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이, 그제야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십 년 만에 그 배신자의 아들이, 배신자의 펜던트를 든 또 다른 계집을 데리고 나타났지. 이건 운명인가, 아니면 신들의 악랄한 농담인가.”
울프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이제 네 차례다, 황녀. 네년이 아는 것을 말해봐라. 네 목숨 값을 할 만한 정보가 아니라면, 오늘 밤 당장 네 심장을 꺼내 우리 부족의 제단에 바칠 테니.”
***
우리는 짐승 우리나 다름없는 작은 천막에 갇혔다. 울프가르는 내 대답을 듣는 대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우리를 이곳에 던져 넣었다. 약간의 마른 빵과 물, 그리고 카엘의 상처를 치료할 조악한 약초가 전부였다.
나는 젖은 천으로 카엘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의 열은 조금 내린 듯했지만, 의식은 여전히 희미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 타오르는 작은 화톳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마리아의 배신, 붉은 달의 추격, 카엘의 비밀, 그리고 이 야만인들의 손에 걸린 내 목숨까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것은 있기나 했던 걸까.
그때, 천막의 입구가 조용히 열리며 한 노파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수많은 주름이 얼굴에 지도를 그리고 있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린 채였다. 목에는 온갖 동물의 뼈와 빛바랜 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등장은 소리 없었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천막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엘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와 가슴을 짚어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군. 하지만 아직 살아남을 의지가 남아있어.”
노파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그녀는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그 안의 가루를 카엘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평범한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쇄골 아래에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몄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실의 딸이여. 그것은 저주이자, 권능이다. 울프가르는 그것을 우리 부족을 옭아맨 족쇄를 풀 열쇠로 보지만… 내 눈에는 문으로 보인다.”
“문…?”
“그래. 세상의 이면과 연결된 문. 억지로 열면 너는 잡아먹힐 것이고, 너무 오래 닫아두면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겠지. 선택은 너의 몫이다.”
노파는 내게 작은 돌멩이 하나를 건넸다. 차갑고 매끄러운, 검은 흑요석이었다.
“그들의 ‘부름’이 느껴질 때, 이것을 꽉 쥐어라. 완벽히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너의 의식이 휩쓸려 가는 것을 잠시나마 늦춰줄 게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돌멩이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적일까, 아군일까. 알 수 없었다. 이 북부 땅에서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내 물음에, 노파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슬퍼 보였다.
“나는 레아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니까. 그 아이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부족을 사랑했지. 다만, 자신이 짊어진 운명보다 더 거대한 사랑을 만났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아들이 어미와 같은 비극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왔을 때처럼 조용히 천막을 나섰다.
나는 혼자 남아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레아. 카엘의 어머니. 그녀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울프가르가 모르는 다른 진실이 있다는 뜻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쇄골 아래의 낙인이 차가운 불꽃처럼 타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노파가 준 흑요석을 꽉 쥐었다. 돌멩이가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손바닥을 데일 듯했지만, 덕분에 이전처럼 의식을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내 머릿속의 방어벽을 비집고, 틈새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오만한 정복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개처럼 부드럽고, 익숙하며, 그리운 목소리.
‘…릴리아….’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심장이 멎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목소리는 내가 지난 두 번의 생을 통틀어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내 가엾은 아가….’
그것은, 나의 어머니, 선황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