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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찢어졌다.
수천 개의 칠흑 같은 가시가 터져 나오는 순간, 동굴 안의 모든 소음이 죽었다. 횃불이 터지는 소리, 전사들의 경악에 찬 비명, 거대한 공동이 울리는 굉음까지도, 내 고막 안에서 진공의 상태로 압축되었다. 시야에 박힌 것은 오직 하나. 나를 지나쳐, 내 등 뒤의 카엘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지는 검은 죽음의 세례였다.
안 돼.
그것은 비명 이전에 터져 나온 본능적인 절규였다. 저 가시들은 나를 향했어야 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나를, 괴물의 달콤한 속삭임에 놀아난 나를 벌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왜. 왜 또다시 그가.
카엘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의 잿빛 눈동자는 쏟아지는 악의를 그저 담담히 마주 볼 뿐이었다. 마치 이미 예견된 자신의 종말을 받아들이는 순교자처럼.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도망치시오.’ 그 절망적인 순간에조차, 그는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내 안의 무언가를 터뜨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석에서부터 팔을 타고 역류하던 검붉은 기운이 방향을 틀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잠식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내 안의 분노와 죄책감을 먹이 삼아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쇄골 아래의 낙인이 지옥의 화인처럼 뜨거워지며, 내 모든 혈관을 타고 그 오만한 힘이 질주했다. 이것은 어머니의 힘도, 붉은 달의 저주도 아니었다. 오직 나의 것. 내가 지금 이 순간 만들어낸, 지배하려는 의지 그 자체였다.
“멈춰!”
내 목에서 터져 나온 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법칙을 거스르는, 원초적인 명령이었다.
내 눈앞에서, 카엘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이었던 수천 개의 검은 가시들이 일제히 허공에 얼어붙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벽에 부딪힌 것처럼. 동굴 안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전사들의 숨 막힌 신음, 울프가르의 믿을 수 없다는 중얼거림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내 안에서 폭주하는 힘은 출구를 원했다. 나는 허공에 멈춘 가시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부서져라. 너희를 만들어낸 그 근원과 함께.
콰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허공에 멈춰 있던 모든 가시들이 역으로 튕겨 나가 제단 위의 심장석을 향해 돌진했다. 검붉은 수정은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처참하게 관통당하며, 비명 같은 파열음을 냈다. 쩍, 쩍쩍, 금이 가던 수정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라 산산조각 났다. 그 안에서 응축되어 있던 모든 악의가 빛 한 점 없는 순수한 어둠으로 변해, 동굴 전체를 집어삼켰다.
내 의식이 끊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둠 속에서도 나를 향해 뻗어오는 카엘의 필사적인 손과,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는 노파 주술사의 얼굴이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세상은 짐승의 털 냄새와 씁쓸한 약초 냄새로 가득했다. 눈을 뜨자 낯선 천막의 천장이 보였다. 희미한 등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몸 아래에는 두꺼운 가죽이 깔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다시 눕혔다. 마치 거대한 짐마차에 온몸이 깔렸다 다시 살아난 듯한 끔찍한 후유증이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바로 옆에서, 익숙하지만 한층 더沙啞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내 옆에 나란히 누워있는 카엘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얼음 속의 불꽃처럼 선명했다. 그의 어깨와 옆구리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살아있었군.”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안도감인지, 아니면 그저 사실 확인인지 알 수 없는 메마른 음성이었다.
“전하 덕분입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나를 훑었다. 경이, 두려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그 힘은… 대체….”
“나도 몰라.”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 순간 나를 움직인 것은 논리나 계산이 아니었다. 오직 카엘을 잃을 수 없다는,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절박한 본능뿐이었다. 그 본능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웠다. 그것이 권능인지, 또 다른 저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천막 밖으로 몰아치는 북부의 칼바람 소리만이 우리의 침묵을 채웠다. 내가 먼저 그 정적을 깼다.
“미안해.”
사과는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내 어리석음 때문에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것에 대한 사과. 그의 진심을 의심했던 것에 대한 사과. 그리고… 그를 죽이려 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뒤늦은 사죄였다.
내 사과에, 카엘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지쳐 보여서, 오히려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그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만큼 교활했으니까요. 그것은 붉은 달이 심어놓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함정입니다. ‘레나’의 그릇을 얻기 위해, 가장 그리운 목소리로 영혼을 좀먹는 망령의 자장가이지요.”
그의 설명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내가 회귀하고, 복수를 결심하고, 마리아에게 배신당하고, 이곳 북부까지 흘러 들어와 심장석 앞에 서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어쩌면 그들의 거대한 각본 위에서 놀아난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당신은 알고 있었나? 내 어머니의 목소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선황후 폐하께서는… 당신이 아는 것처럼 나약한 분이 아니셨으니까요. 그분은 ‘레나’의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황후가 되어 저주를 안에서부터 파괴하려 했던 최초이자 마지막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당신에게 저주를 힘으로 받아들이라 속삭일 리가 없지요.”
그의 말은 또 한 번 내 세계를 흔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다정하고 병약했던 어머니의 모습 뒤에, 그런 거대한 비밀과 의지가 숨어 있었다니.
그때, 천막 입구가 조용히 열리며 노파 주술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야라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따뜻한 김이 오르는 그릇 두 개를 내려놓았다. 멀건 수프였지만, 고소한 냄새가 허기진 배를 자극했다.
“몸을 추스를 기운은 차렸나 보군.”
야라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화톳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뒤적였다.
“울프가르는 길길이 날뛰고 있다. 부족의 심장석을 부숴버렸으니, 당장이라도 네년의 목을 잘라 선조들께 바치고 싶어 하지.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어. 네가 보여준 힘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너는 심장석을 파괴한 게 아니다. 이미 고름이 가득 차 썩어가던 종기를 터뜨렸을 뿐. 그 돌은 아주 오래전부터 붉은 달의 악의에 오염되어 있었다. 우리 부족은 그걸 정화하려 애썼지만, 결국엔 그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너는… 우리 모두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것이다. 방식이 거칠었을 뿐.”
그녀의 말은 예상 밖의 위로였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울프가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내 물음에, 야라는 한참 동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택은 울프가르의 몫이다. 그는 너를 죽여 부족의 분노를 잠재울 수도 있고, 아니면… 너를 이용해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는 족장이다. 언제나 부족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자이지.”
***
야라의 말대로, 울프가르의 선택은 그 다음 날 내려졌다.
그는 열댓 명의 무장한 전사들을 이끌고 우리의 천막으로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혼란, 그리고 일말의 경외심이 뒤섞여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내 옆의 카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노골적인 경멸이 떠올랐다.
“네년이 우리 부족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남부 계집.”
울프가르가 으르렁거렸다.
“그 대가는 마땅히 죽음으로 치러야겠지. 하지만 선조들께서 꿈에 나타나 내게 말씀하셨다. 낡은 심장이 부서진 자리에, 새로운 심장을 가져와야 한다고.”
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희는 원래 침묵의 현자의 탑으로 가려 했지. 좋다. 내가 그 길을 열어주겠다.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 너희를 탑의 입구까지 안전하게 안내할 것이다. 너희를 노리는 붉은 달의 사냥개들로부터 지켜주기도 할 테지.”
그의 제안은 너무나도 관대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특히 이 늑대들의 땅에서는 더더욱.
“조건이 뭐지?”
내가 묻자,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탑의 주인, 침묵의 현자에게서 ‘세상의 눈물’을 가져와라. 그것만이 오염된 우리 땅을 정화하고, 새로운 심장석의 핵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만약 빈손으로 돌아오거나 도망칠 생각을 한다면…….”
그는 말을 끊고, 카엘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반쪽짜리 늑대 새끼의 심장을 대신 가져갈 것이다. 이것이 너와 우리 부족 사이의 새로운 약속이다.”
그것은 선택지를 주는 척하는 협박이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침묵의 현자의 탑은 어차피 우리가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눈물’이라는 알 수 없는 물건을, 세상과 단절된 대마법사에게서 어떻게 얻어낸단 말인가.
“좋아. 그 약속, 받아들이지.”
내 대답에 울프가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카엘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는 단순한 경멸 이상의, 오래 묵은 원한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한 가지 더. 그 길은 네놈에게 속죄의 길이 될 게다, 카일.”
울프가르가 처음으로 카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네놈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이번 기회에 씻어내라는 말이다. 황녀가 약속을 지키도록, 목숨을 걸고 보좌해라. 만약 실패한다면, 네놈은 우리 부족에게 진 빚을 영원히 갚지 못하게 될 테니.”
과거에 저지른 죄? 나는 의아한 눈으로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보였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울프가르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기묘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지? 당신이 말하는 ‘검은 늑대’라는 건 또 뭐고.”
내 질문에, 울프가르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모르고 있었나, 황녀? 이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목숨을 맡기고 있었단 말인가.”
울프가르는 일부러 나를 보며,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말했다.
“이놈의 어미, 레아는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지. 하지만 이놈은 달랐다. ‘검은 늑대’ 카일은… 우리 부족의 젊은 피들을 선동해, ‘정원의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남쪽 제국을 멸망시킬 무기로 삼자고 주장했던 놈이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놈은 평화를 원한 게 아니었어. 오직 복수와 파괴만을 원했지. 그 어리석은 반란이 실패하고 쫓겨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북부 전체가 이놈 때문에 불바다가 되었을 게다. 그런 놈이다, 네가 지금 믿고 있는 남자는.”
울프가르의 폭로가 얼음송곳이 되어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울프가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차마 나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간신히 다시 쌓아 올리기 시작했던 세상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