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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르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천막 안에 떨어진 독침이었다.
그것은 공기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아니라, 내 귀를 파고들어 뇌수에 직접 박히는 악의 그 자체였다. 제국을 멸망시킬 무기. 복수와 파괴.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카엘, 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나를 먼저 염려하던 그 남자의 모습 위로, 울프가르가 덧칠한 ‘검은 늑대’의 잔상이 괴물처럼 겹쳐졌다.
숨이 막혔다. 배신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뒤틀린 감정이었다. 나는 그를 믿은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주 작은 불씨처럼, 그가 내 편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타오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울프가르의 폭로는 그 작은 불씨 위로 차가운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희망은 역겨운 연기를 피우며 꺼져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카엘이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꽉 다문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변명보다 더 확실한 긍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내 목소리는 나조차 놀랄 만큼 차갑고 단단했다. 겨울 호수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었다. 천막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지만, 나는 오직 그에게만 집중했다.
“내 눈을 보고 말해. 사실인가?”
카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 눈 안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 꺼지지 않는 분노, 그리고… 지독한 체념.
“……사실이오.”
그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단 세 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다 담지 못할 과거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실소했다. 입가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건조하고 공허했다. 또다시. 나는 또다시 사람을 잘못 보았다. 마리아의 상냥한 미소 뒤에 숨겨진 칼날과, 카엘의 고통스러운 헌신 뒤에 감춰진 파괴욕. 대체 무엇이 다른가. 결국 나를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그랬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처 입은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신을 잠식하는 기만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울프가르를 마주 보았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침묵의 현자에게서 ‘세상의 눈물’을 가져오겠다. 그 대가로, 당신들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고 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줘.”
내 결정에 카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울프가르가 먼저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현명하군, 황녀. 저런 배신자의 말을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 늑대들과의 거래가 훨씬 안전하겠지.”
울프가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사들에게 손짓했다.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식량과 따뜻한 가죽옷을 챙겨줘라. 손님이 아니라, 우리의 중요한 ‘심부름꾼’이니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되지.”
그의 조롱 섞인 말에 전사들이 킬킬거리며 흩어졌다. 천막 안에는 나와 카엘, 그리고 울프가르만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카엘에게 던졌다.
“똑똑히 들었겠지, 검은 늑대. 네년의 어미가 남긴 빚과, 네놈이 새로 만든 죄를 씻을 마지막 기회다. 만약 황녀의 임무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네 심장은 내 손으로 직접 꺼내 까마귀의 먹이로 던져줄 테니.”
울프가르는 그 말을 남기고 천막을 나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사라지자, 천막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남았다.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짐승의 털로 만든 두꺼운 외투를 걸쳤다.
“전하.”
카엘이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소. 과거의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리석고, 분노에 찬 짐승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입 다물어.”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네 과거 따위엔 관심 없어. 내가 지금 너를 살려두는 이유는 단 하나, 네 목숨이 울프가르와의 거래를 담보하는 인질이기 때문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착각하지 마.”
내 잔인한 말은 비수가 되어 그에게 날아갔다. 그의 뒤에서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쏟아져 들어오는 북부의 눈부신 햇살이, 오히려 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은 온통 흰색과 회색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앙상한 가지만 남은 침엽수림,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 하늘. 북부의 풍경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울프가르는 약속대로 자신의 정예 전사 다섯을 우리와 동행시켰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나에게 처음 창을 겨누었던 하르칸이라는 사내였다. 그들은 길 안내인이라기보다는 감시자에 가까웠다. 그들의 눈빛에는 우리, 특히 카엘을 향한 경계와 불신이 노골적으로 서려 있었다.
카엘과 나 사이의 침묵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우리는 하루 종일 말을 섞지 않았다. 눈밭을 밟는 소리, 거친 바람 소리, 그리고 우리의 힘겨운 숨소리가 유일한 대화였다. 카엘은 묵묵히 내 반 발짝 뒤에서 걸었다. 그의 부상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험한 비탈길이 나오면 말없이 내 팔을 부축하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얼음처럼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제국을 불태우려 했던 ‘검은 늑대’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 같아 구역질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바람의 방향을 읽고 눈사태의 위험을 감지하는 그의 예리함, 늑대 전사들조차 놓치는 짐승의 흔적을 찾아내는 그의 감각, 그리고 지친 기색 없이 묵묵히 짐을 나눠지는 그의 인내력까지. 그는 완벽한 북부의 전사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저 모든 능력이, 한때 제국을 향한 파괴욕을 위해 쓰였단 말인가.
여정의 셋째 날 밤, 우리는 거대한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동굴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하르칸과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딱딱한 육포를 씹으며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와 카엘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앉아 있었다.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얼굴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괴물의 속삭임이, 그리고 실망과 체념으로 가득했던 카엘의 잿빛 눈동자가 불길 속에서 아른거렸다.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회귀 전의 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죽었고, 회귀 후의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드시오.”
카엘이 나무 그릇에 담긴 뜨거운 물을 내밀었다. 눈을 녹여 끓인, 아무 맛도 없는 물이었지만 온기만은 절실했다. 나는 말없이 그릇을 받아들었다. 우리의 손가락이 스치는 순간, 그가 움찔하며 손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
나는 늑대 전사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오랜 침묵을 깬 첫 질문이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사냥과 다음 경로에 대한 이야기요.”
“그들은… 당신을 미워하는군.”
내 말에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부족을 배신하고,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렸소. 그들 눈에 나는 명예를 모르는 겁쟁이일 뿐이다.”
“‘검은 늑대’는… 영웅 아니었나?”
나는 일부러 상처를 찌르듯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또다시 침묵으로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영웅과 괴물은 종이 한 장 차이요, 전하. 나는… 그 선을 넘었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부족 아이들이 저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내 안의 무언가가 끊어졌지. 나는 저주를 막는 것이 아니라, 저주 그 자체가 되어 복수하는 길을 택했소. 그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 믿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후회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어리석었지. 분노는 눈을 가리고, 복수심은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소. 내가 휘두르려 했던 그 힘은, 결국 나 자신과 내 부족까지 모두 집어삼켰을 게요. 울프가르가 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고백은 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냉정한 해부이자,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결이었다. 그의 고통이, 그의 분노가 아주 조금, 아주 희미하게 이해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네 과거는 네가 짊어질 짐이야. 나에게 이해를 구하지 마.”
나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던 늑대 전사들 중 하나가, 문득 말이 끊기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도 없이,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육포 조각이 눈밭 위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케르단!”
하르칸이 외치며 쓰러진 동료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눈을 부릅뜬 채, 얼굴에는 극심한 공포가 얼어붙어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다. 마치 영혼만 순식간에 뽑혀나간 것처럼.
순간, 동굴 안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바람 소리마저 숨을 죽였다. 모닥불의 불길이 기이한 보랏빛으로 변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공기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온몸을 찔렀다.
“전하, 제 뒤로!”
카엘은 반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위험을 감지한 늑대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 하르칸과 남은 전사들도 무기를 꺼내 들고 원형으로 진을 짰다. 그들의 얼굴에는 야만적인 용맹함 대신, 원초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는 쇄골의 낙인을 감쌌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부름’이 아니었다. 그림자 사냥개의 기운도 아니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미지의 존재였다.
그때, 동굴 입구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바닥의 눈이 녹는 대신, 검은 서리가 피어났다. 그것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직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주변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이는, 절대적인 ‘무(無)’의 현신이었다.
“크… 크아악….”
늑대 전사 중 하나가 목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파랗게 질려가며, 눈과 코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숨 쉬지 마! 저 그림자가 내뿜는 공기는 독이다!”
카엘이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비명을 지르던 전사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니, 케르단과 똑같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명을 잃었다.
꿈틀거리던 그림자는 천천히 하나의 형태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길고 가는 팔다리를 가진, 인간과 거미를 뒤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그것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공허한 어둠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직접 박히는 텔레파시였다.
‘찾았다… 배신의 씨앗….’
그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수백 년 묵은 노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 이질적인 음성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 괴물은 우리를 둘러보았다. 하르칸에게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카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그것의 목표는 카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엘을 투과하여, 그 뒤에 있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정원을 더럽힌… 가증스러운 잡초로구나….’
그림자의 손이 천천히 나를 향해 뻗어왔다. 그 손끝이 닿는 공간마다 대기가 얼어붙고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저것에 닿으면 끝장이었다.
“물러서시오!”
카엘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칼날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림자의 몸을 통과했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하르칸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정원의… 정원의 수호자다! 전설로만 듣던… 황실의 망령!”
황실의 망령? 정원의 수호자? 머릿속이 혼란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림자의 손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카엘이 필사적으로 나를 밀쳐냈지만, 그림자의 움직임은 공간 자체를 무시하는 듯했다. 피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품속, 어머니의 유품인 작은 펜던트가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방어막처럼 내 주위를 감쌌고, 그림자의 손은 빛에 부딪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 괴물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머리가 있어야 할 공허한 공간이 분노로 일렁였다.
‘아델리아…! 그 배신자의 흔적을… 아직도 품고 있었구나!’
그것은 내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펜던트의 빛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그것의 새로운 목표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그것의 일그러진 시선은,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카엘, 그리고 그의 핏속에 흐르는 또 다른 ‘배신자의 흔적’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