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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는 내 고막이 아니라 영혼에서부터 울렸다.
어머니의 유품이 토해낸 차가운 빛은 그림자 괴물의 손길을 잠시 막아냈을 뿐, 그 악의를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부서진 빛의 파편들이 눈송이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것과, 그림자의 뒤틀린 시선이 카엘에게로 향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펜던트의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 그림자는 이미 한 번 겪은 방해물을 무시하고, 더 연약하고 본질적인 먹잇감을 찾아낸 것이다. 배신자의 피.
‘네놈의 근원은… 더럽고 추악하구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은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림자의 손이, 아니, 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의 어둠 덩어리가 카엘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움직임은 물리법칙을 비웃었다. 공간을 건너뛰는 듯한 그 공격을, 부상당한 카엘이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죽음은 이제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순간,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릿속에서는 울프가르의 잔인한 폭로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국을 멸망시키려 했던 남자. 복수심에 불타던 검은 늑대. 그런 자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내 복수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걸림돌 하나가 사라지는 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에 어렸던 절망이, 그럼에도 나를 밀쳐내려 했던 마지막 몸짓이, 내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다. 여기서 그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평생 이 순간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횃불!”
내 절규는 동굴 전체를 울렸다. 공포에 질려 굳어 있던 하르칸과 남은 늑대 전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저 괴물에게 던져! 어둠이라면, 빛이 약점일 터!”
내 외침은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하르칸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빨을 드러낸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횃불을 그림자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죽어라, 망령 자식!”
타오르는 횃불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림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횃불은 마치 물속을 지나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그림자의 몸을 통과해 반대편 벽에 부딪혀 부서졌다. 우리의 희망도 그 불꽃과 함께 허무하게 부서져 내렸다.
‘어리석은 필멸자들. 빛은…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짙게 만들 뿐.’
그림자의 조소가 머릿속을 꿰뚫었다. 그것의 손이 마침내 카엘의 가슴팍을 움켜쥐기 직전이었다. 카엘은 마지막 저항으로 단검을 들어 제 앞을 막아섰지만, 그 강철 조각이 무형의 악의를 막아낼 리 만무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횃불이 아니라, 동굴 중앙에서 모든 것을 태우고 있는 거대한 모닥불. 그리고 그 불길에 달궈져 시뻘겋게 빛나고 있는, 전사들이 음식을 데우기 위해 걸어두었던 쇠꼬챙이. 빛이 아니라, 열.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 저것이라면.
나는 비틀거리며 내달렸다. 맨손으로 그 이글거리는 쇠꼬챙이를 잡아챘다.
“크윽!”
손바닥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이 온 신경을 후벼 팠지만, 나는 비명조차 지를 여유가 없었다. 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살점 타는 역겨운 냄새를 무시한 채, 나는 남은 힘을 전부 끌어모아 그것을 창처럼 투척했다. 목표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림자의 손에 붙들리기 직전인, 카엘의 심장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심장 바로 앞의 허공.
쇠꼬챙이는 붉은 혜성처럼 날아가, 카엘의 가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의 어둠과 작열하는 강철이 마주쳤다.
치이이이이익-!
물이 끓어 증발하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함께, 그림자의 손 부분이 격렬하게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것은 처음으로 고통에 찬 무언의 비명을 질렀다. 꿈틀거리던 형체가 불안정하게 흩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그것에게, 순수한 열기는 통했다.
그림자는 분노로 일렁였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얕보지 않았다. 동굴 안의 한기가 더욱 짙어지며, 동굴 벽면의 검은 서리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오기 시작했다.
“젠장맞을…!”
하르칸이 욕설을 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제는 동굴 전체가 저 괴물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그림자 괴물이 동굴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바꾸려던 바로 그 순간, 동굴 입구 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정찰을 나갔던 다른 늑대 부족의 무리가 돌아온 것이다. 수십 개의 횃불 빛과 전사들의 함성이 어둠을 갈랐고, 예상치 못한 방해에 그림자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우리를, 특히 나와 카엘, 그리고 내 손에 들린 펜던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 공허한 어둠 속에서 증오와 집착이 느껴졌다.
‘다시 돌아오겠다… 배신자의 씨앗들. 정원은… 반드시 정화되어야 하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림자는 스르르 녹아내리듯 바닥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와 동시에, 뼛속까지 파고들던 한기가 옅어지고 모닥불이 다시 주황빛을 되찾았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채 밀려오기도 전에, 긴장이 풀린 몸이 비명을 질렀다. 쇠꼬챙이를 움켜쥐었던 오른손은 끔찍하게 타들어가,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엘이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부축했다.
“전하! 손이….”
“…만지지 마.”
내 목소리는 얼음 조각 같았다. 나는 그의 부축을 뿌리치고, 성한 왼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구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동굴 안은 처참했다. 멀쩡한 사람은 단 셋. 나와 카엘, 그리고 하르칸뿐이었다. 마지막 남았던 늑대 전사는 그림자가 내뿜는 독기에 중독되어, 이미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새로 도착한 전사들이 동굴 안의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르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죽은 동료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이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주먹으로 얼어붙은 바닥을 내리쳤다.
“정원의 수호자… 전설이 진짜였어. 황실의 개가, 정말로 여기까지 우리를 쫓아올 줄이야.”
나는 너덜너덜해진 손을 감싸 쥐며 그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뭐지? 황실의 망령이라니.”
하르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나를 향한 경멸이나 불신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정체 모를 공포와, 아주 희미한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 부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제국의 초대 황제가 자신의 비밀 정원을 만들었을 때, 그곳을 지키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쳐 그림자 망령을 만들었다고 했지. 그 망령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정원을 더럽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는 임무만을 수행한다고. 그 후로, 제국의 황제가 바뀔 때마다 수호자 역시 새로운 주인을 섬긴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그는 말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황제, 나의 아버지는 ‘정원의 저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수호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저 괴물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수호자는… 주인의 의지를 가장 순수하게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고 했다.”
카엘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가로챘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어둠이 사라진 동굴 입구를 향해 있었다.
“만약 현 황제 폐하의 의지가 아니라면, 그 이전의 주인의 의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겠지. 정원을 향한… 뒤틀린 집착과 함께.”
선황제. 나의 할아버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역사책 속의 인물. 그분의 원념이 아직도 저런 괴물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거대한 안갯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림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아델리아…! 그 배신자의 흔적을… 아직도 품고 있었구나!’
그것은 내 어머니를 ‘배신자’라고 불렀다. 카엘의 어머니 레아처럼. 이 북부 땅에서는, 그리고 제국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이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카엘을 향해 돌아섰다. 그와 나 사이에는 타다 남은 모닥불의 잔해가 금처럼 그어져 있었다.
“네 어머니도, 내 어머니도 배신자라 불리는군.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내 질문에, 카엘의 잿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또 숨길 셈인가? 네가 나를 기만하고, 저 망령이 우리를 죽이려 한 이 순간에도? 네가 입을 다물수록, 나는 너를 ‘검은 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취급할 수밖에 없어.”
내 협박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꽉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눈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전하의 어머니, 선황후 폐하께서는… 저주를 멈추기 위해 ‘정원의 심장’을 훔쳤소.”
“정원의 심장?”
“정원의 저주를 유지하고, 수호자에게 힘을 공급하는 동력원. 그것이 없다면 저주도, 수호자도 서서히 힘을 잃고 소멸하게 되지. 선황후께서는 그것을 훔쳐, 세상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봉인하셨소. 그 대가로… 그분은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고, 수호자의 영원한 표적이 된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어머니는 제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끔찍한 망령에게 쫓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유산이, 지금 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 목에 걸린 이 펜던트가, 바로 그 봉인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그 심장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것까지는… 나도 알지 못하오. 다만, 선황후께서 남긴 유일한 단서는 침묵의 현자에게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래서 내가 당신을 그곳으로 이끌려 했던 것이고.”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 붉은 달, 정원의 저주, 수호자, 그리고 두 어머니의 희생까지. 이 모든 길의 끝이 결국 침묵의 현자의 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
우리는 그 동굴에서 밤을 새웠다. 하르칸은 새로 온 전사들과 함께 주변 경계를 강화했고, 나는 늑대 부족의 조악한 약초로 화상을 입은 손을 치료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하르칸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태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녀. 어젯밤, 당신은 우리를 구했소. 당신의 용맹함은 진정한 북부의 전사와 같았지. 나는 당신을 오해했소. 부디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과는 필요 없다. 대신, 약속해. 나와 그가 탑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불신과 감시는 없다고.”
나는 턱짓으로 모닥불 옆에 앉아 묵묵히 단검을 손질하고 있는 카엘을 가리켰다. 하르칸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지만, 그는 이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늑대 전사들의 적의는 사라졌고, 카엘과 나 사이의 얼음장 같던 침묵에도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우리는 여전히 말을 섞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시선에는 이전과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인질이나 감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 지독한 운명을 함께 헤쳐나가야 할, 유일한 동행자였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날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마침내 길고 험준했던 산맥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얼음 호수였고, 그 호수의 정중앙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거대한 탑. 탑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정처럼 보였고,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침묵의 현자의 탑이었다.
하지만 탑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호수는 너무나도 넓었고, 그 표면은 칼날 같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임무다.”
하르칸이 말했다. 그는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탑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고 들었다. 자격이 없는 자는 평생 저 호수 주변을 헤맬 뿐, 단 한 걸음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 이제부터는 당신들의 몫이다. 부디, ‘세상의 눈물’을 가지고 돌아오길 선조들께 기도하겠소.”
하르칸과 전사들은 우리에게 남은 식량과 가죽을 넘겨주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미련 없이 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광활한 설원 위에, 나와 카엘, 단둘만이 남겨졌다. 거대한 수정 탑을 마주한 채.
나는 카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탑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카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어깨가 흠칫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은 이번 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의문으로 흔들렸다.
“너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안하지.”
나는 내 목에 걸린 어머니의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지금부터 너와 나는 동맹도, 주인과 호위도 아니다. 우리는 공범이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나에게 말해. 너의 과거, 내 어머니의 비밀, 그리고 ‘정원의 저주’의 모든 것. 그 대가로, 나는 네가 이 여정의 끝에서 살아남도록 만들겠다. 이것은 온정이나 용서가 아니야. 오직 거래일 뿐.”
내 차가운 선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는 마지막 진실을 말씀드린다면, 전하께서는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반문은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말해.”
그는 시선을 들어, 나를 지나 내 뒤의 거대한 수정 탑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처럼 낮고 서늘했다.
“저 탑의 주인, 침묵의 현자는… 당신의 어머니, 선황후 아델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