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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제13화: 독이 든 축배, 뱀의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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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은 끝났다.

이성과 본능이 머릿속에서 벌이던 지리멸렬한 전쟁은, 이솔데의 입술이 은잔의 가장자리에 닿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막을 내렸다. 내 안의 용병 ‘그림자’는 속삭였다. 저 여자의 죽음은 네게 아무런 손해가 아니라고. 오히려 이안이라는 변수를 완벽하게 네 손안에 쥘 기회라고. 하지만 죽은 황녀 ‘카일루스’는 비명을 질렀다. 또다시 눈앞에서 무고한 피가 흐르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고.

나는 그림자를 죽이고 카일루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니, 어쩌면 그 둘을 모두 죽이고, 오직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짐승이 되기로 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 몸은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뚱뚱한 남작의 등을 가볍게,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밀었다. “어이쿠!” 남작은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의 육중한 몸은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시종의 은쟁반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쨍그랑!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회장을 갈랐다. 은쟁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수십 개의 크리스탈 잔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대리석 바닥 위에서 무참하게 깨져나갔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뚝 끊겼고,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일순간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경악에 찬 비명.

모두의 시선이 소음의 진원지로 쏠린 그 찰나. 이솔데의 손에 들려 있던 은잔 역시, 그 혼란의 파도에 휩쓸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은잔이 바닥을 굴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붉은 샴페인이 마치 피처럼 대리석 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나는 가면 아래에서 최대한 당황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쓰러진 남작에게 다가가 부축하는 척했다. 내 연기는 완벽했다. 그 누구도 이 아수라장이 한 여인의 계산된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엘레노어 백작 부인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인자한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 위로, 뱀처럼 차갑고 교활한 분노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의 눈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배후가 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녀의 눈빛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네 년이 감히.’

“모두 진정하라!”

황태자 아서의 목소리가 사자의 포효처럼 연회장을 울렸다. 그는 놀란 이솔데를 자신의 등 뒤로 감싸 보호하며, 혼란에 빠진 귀족들을 향해 위엄 있게 외쳤다.

“단순한 사고일 뿐이다. 근위대는 현장을 수습하고, 연회에 방해가 된 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

진홍의 사자단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사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전,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저 멀리, 기둥 뒤에서 뛰쳐나온 이안이 혼란을 틈타 이솔데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동생의 안위를 확인하고 안도하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약속했던 발코니를 향해, 춤추는 인파가 아닌 공포에 질려 흩어지는 인파를 역류하며 헤쳐 나갔다. 등 뒤로 엘레노어의 시선이 독침처럼 따갑게 박혀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이 연회장은 거대한 덫이 되어 우리를 옥죄어 올 터였다.

***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태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암살의 공포는 귀족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모두가 출구를 향해 비명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저택의 모든 문은 이미 근위대에 의해 굳게 닫혀 있었다. 황태자는 범인을 잡기 전까지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내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쪽이야!”

혼란 속에서 누군가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안이었다. 그는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발코니는 경비가 더 삼엄해졌을 거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해.”

그는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거슬러, 나를 연회장 구석의 좁은 복도로 이끌었다. 시종들이나 드나들 법한, 어둡고 후미진 길이었다. 우리의 발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고함 소리와 군홧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이쪽도 막혔어!”

복도 끝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는 완벽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값비싼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창문은 모두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육중한 갑옷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의 양쪽에서, 횃불을 든 진홍의 사자단 기사들이 나타나 우리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거기 서라!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혀라!”

기사들의 서슬 퍼런 외침에, 이안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아 저지했다. 여기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였다. 기사는 최소 대여섯. 이 좁은 복도에서 승산은 없었다.

순간, 내 눈에 벽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문고리의 윤곽이 들어왔다. 지도에는 없던 비밀 통로. 나는 이안의 손을 잡아끌고, 망설임 없이 태피스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쪽이야!”

내가 낡은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먼지 쌓인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비밀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우리는 절망했다. 그곳은 막다른 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낡은 가구들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작은 창고.

“젠장!”

이안이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밖에서 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 안에 있다! 문을 부숴라!”

쿵!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 안을 미친 듯이 훑었다.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그때, 이안이 나를 방 안의 거대한 옷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

“너는!”

“시간이 없어.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는 나를 희생양 삼아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먼저 숨기고,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결연하게 빛났다. 그 안에는 계산이 아닌, 기묘한 책임감과 빚을 갚으려는 자의 결의가 담겨 있었다.

“멍청한 짓 하지 마!”

내가 그의 팔을 잡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 옷장 문을 닫아버렸다. 좁고 어두운 옷장 안, 퀴퀴한 좀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삐걱거리는 문틈 사이로, 밖의 상황이 희미하게 보였다.

쾅!

마침내 문이 부서지며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이안은 검을 뽑아 든 채,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은 누구냐!”

“길을 잃은 손님일 뿐이다. 이 소란은 대체 무엇이지?”

이안은 가면 아래에서 최대한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기사 대장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가면을 벗어라.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다.”

나는 숨을 죽였다. 이안의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는 발레리우스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몸. 황태자는 그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옷장 안에서 단검을 고쳐 쥐었다. 최악의 경우, 저 기사들을 모두 베고 이안과 함께 피바다를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부서진 문밖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칼을 거두어라.”

우아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하지만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기묘한 권위가 담긴 목소리. 기사들이 놀라 길을 열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자수정처럼 빛나는 기묘한 눈동자. 그리고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듯한 비웃음 띤 미소.

마르셀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안과 기사들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기사 대장에게 말했다.

“이런, 이런. 이분은 제 소중한 손님이신데, 우리 용감한 기사 나으리들께서 큰 실수를 하실 뻔했군.”

“마르셀 님, 하지만 이 자는….”

“내 손님일세. 황태자 전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그러니 이만 물러가 주겠나? 내 귀한 손님께서 댁들의 땀 냄새 때문에 불쾌해하시는 것 같으니.”

마르셀의 말에 기사 대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하지만 그는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 제국의 그림자 속 실세인 마르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황태자의 명령을 어기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은 마지못해 칼을 거두고, 찝찝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옷장 안에서,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기사들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안은 여전히 검을 내리지 않은 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마르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르셀은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방 안을 어슬렁거리며 먼지 쌓인 가구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당신들은 어딜 가나 이렇게 소란을 피워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마르셀은 얄미운 목소리로 말하며, 내가 숨어 있는 옷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적이 뭐지?”

이안이 차갑게 물었다.

“목적이라. 글쎄… ‘투자’라고 해두지.”

마르셀은 낡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나는 혼돈을 사랑하거든. 그리고 당신들은 아주 훌륭한 혼돈의 씨앗이야. 황혼의 교단이라는 놈들은 너무 고지식해서 재미가 없단 말이지. 판을 흔들려면, 당신들처럼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좀 섞여야 제맛 아니겠어?”

그의 말은 모든 것이 게임이라는 투였다. 제국의 운명도, 우리의 목숨도, 그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에게 빚을 진 상황이었다.

“옷장 속의 아가씨, 이제 그만 나오시지? 숨 막혀 죽기 전에.”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옷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오호, 드레스가 꽤 잘 어울리는데? 전장에 구르는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군.”

나는 그의 경박한 칭찬을 무시하고, 본론을 물었다.

“엘레노어 백작 부인. 교단의 일원인가?”

“일원? 하하, 그 정도 수준이 아니지. 그녀는 ‘초승달과 뱀’을 움직이는 최고위 간부 중 하나야. 선황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려 10년 넘게 교단의 눈과 귀 역할을 해왔지. 당신의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을걸.”

그의 말이 비수처럼 심장에 박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했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광경. 소란이 일어나고, 은잔이 바닥에 떨어지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이솔데의 손.

“……낙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안과 마르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잔이 떨어질 때 봤어. 이솔데의 손등에… 아주 희미하게, 붉은 장미 넝쿨 같은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게 뭐지?”

이안이 초조하게 물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용병 시절, 남부의 어느 소왕국에서 비슷한 저주에 걸린 귀족을 본 적이 있었다.

“접촉성 마법 저주야. 독이 든 건 술이 아니었어. 은잔 그 자체였지. 잔에 닿는 순간, 피부를 통해 마법이 스며들어 심장에 낙인을 새기는 방식이야. 보통은 며칠에 걸쳐 서서히 심장을 조여오다가, 마지막엔 온몸의 피를 검게 태우며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 해독약은 오직 시전자만이 만들 수 있고.”

내 설명에, 이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방금 전까지 동생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이제는 더 깊은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우리는 이솔데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죽음을 아주 잠시, 유예시켰을 뿐이었다.

마르셀은 내 설명을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었다. 그는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빙고. ‘가시 돋친 입맞춤’이라고 불리는, 교단에서도 아주 까다로운 고위 주술사만 쓸 수 있는 저주지. 축하해. 당신들은 이제 시간과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군. 황태자의 약혼녀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들어가는 꼴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혼돈이 어디 있겠어?”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은 감정을 터뜨릴 때가 아니었다.

“해독할 방법은?”

내가 마르셀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걸 알면 신이게? 하지만 힌트는 줄 수 있지. 저주를 건 자는 엘레노어 백작 부인. 그녀를 잡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 물론, 지금쯤 그녀는 이미 제국의 가장 깊은 쥐구멍으로 숨어 들어간 뒤겠지만.”

마르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자, 내 역할은 여기까지. 이 저택을 빠져나갈 비밀 통로는 저쪽 벽난로 뒤에 있네. 행운을 빌지, 혼돈의 씨앗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고 이 판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그는 윙크를 한번 날리고는,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절망적인 침묵만이 남았다. 이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벽에 몸을 기댔다. 유일한 빛을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그 빛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럼, 이솔데는…?”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떨려왔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결심을 굳혔다. 엘레노어 백작 부인. 그 여자는 내 어머니를 배신했고, 이제는 이안의 여동생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여자를 찾아야 해.”

내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반드시, 내 손으로 그 심장을 꿰뚫고 해독약을 받아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