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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하던 감정의 물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황제의 말은 내 머릿속에서 여운처럼 남아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지원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그의 눈빛에는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무게감이 실린 부탁이었다.
어쩌면 이곳에서의 생존이 단지 황제를 돕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이 되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익숙한 여운이 내 친구처럼 찾아왔다. 빙의 이후로 이세계에서 마주한 상황들이 날 경계하게 만들었지만, 끈질긴 용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곳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찰나,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방 안의 고요를 깨웠다.
"들어오세요," 가볍게 말하자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의 시녀로, 항상 나를 보조하던 사람이었다.
"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그녀의 표정은 엄숙했다. 오늘 일어난 일들이 이미 온 궁 중에 퍼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하고 그녀를 따랐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궁의 분위기는 여전히 장엄하고도 전쟁 직전의 긴장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방을 지나칠 때마다 근위병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황제의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이미 다른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먼 길을 막고 서 있었고, 나는 잠시 뒤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금방 황제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었다. "세아 공녀, 들어오세요. 긴급한 일이 있어서 부른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나가 그의 앞에 섰고, 다른 신하들이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문을 열었다. "폐하, 이 사건의 배후에는 상당한 세력이 있는 듯합니다.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내통자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황제는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나를 쳐다봤다. "이런 일들이 공녀께도 불편함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녀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저도 이곳에 대해 아직 많이 모르니 말입니다." 진실된 마음이 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조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적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그들이 언제든 우리를 노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황제가 나와 함께 하길 원한다면, 그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와 손잡고 지금의 위기를 넘기려 했다.
신하들과의 회의가 끝나자,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나의 존재가 이곳에서 어떻게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황제를 돕고자 하는 일념이 교차했다.
그러나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이 가져오는 긴장감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단순한 일이 아닌 항상 더 많은 것을 암시했다.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음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알아야 했다. 그가 정말 나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체크메이트로 삼고 있는 것인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에 내게 닥쳐올 무언가를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황궁에서의 각종 사건이 현실로 닥쳐올 것이고,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내야 했다. 그저 또 하룻밤을 보내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궁녀들이 나를 삼켜버릴 듯한 어두운 복도를 지나칠 때, 황제의 그 따뜻한 미소는 여전히 내게 담고 있던 보호의 의미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곳에서 악녀 한세아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는, 이제 황제의 곁에 있는 동안 감춰진 진실을 드러낼 준비가 필요했다.
내일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갈 길이 멀었고, 내가 얼마나 악녀인 척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 새로운 삶을 어깨에 짊어질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