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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로비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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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유리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리자, 하은의 손이 차 문을 잡은 채 굳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네온 불빛을 등지고 다가오며, 가죽 코트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하은, 기다려. 내가… 진짜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진우의 전 상사 박철민이 아니었다. 40대 중반의 남자, 하은의 아버지 회사 법무팀 차장인 김상현이었다. 그의 구두가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가 로비를 울렸고, 손에 든 서류철에서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진우가 하은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바닥이 뜨거웠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 “또 누구야? 오늘 밤은 끝이 없군.”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끝부분이 살짝 갈라졌다.

하은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김상현을 바라보았다. “상현 차장님, 왜 여기 계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문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김상현이 서류철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이건 네 아버지가 숨긴 진짜 기록이야. 하은 씨, 네가 2년 전 진우 씨를 처음 본 날부터 계약 조작에 관여한 증거지. 그런데 이 서류, 네가 직접 서명한 게 아니더군.”

민준이 로비 벤치에 기대어 서서 웃었다. “또 증거? 지겹지도 않나.” 수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가방 끈을 비틀었다. 성호는 담배를 문 채 미소를 지으며 연기를 내뱉었다.

진우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서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뭐지? 하은이 몰랐던 계약서라고?”

김상현이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네 전 회사에서 하은 씨 아버지가 진우 씨를 이용해 사기를 치려던 계약이야. 그런데 하은 씨, 네가 그걸 막으려고 한 기록이 여기 있어. 대신 네가 아버지 회사를 보호하려다 진우 씨를 끌어들인 흔적도.”

하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진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따뜻한 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럴 리 없어요. 저는 검토만 했을 뿐이라고요.”

박 과장이 차 경적을 울렸다. “이제 그만. 사장님 기다리십니다.” 그들은 차에 올랐다. 하은은 진우 옆에 앉았고, 김상현이 뒤따랐다. 차 안 공기가 답답했다. 엔진 소리가 창문을 울리며 거리를 가로질렀다.

진우가 하은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손길이 얇은 스타킹을 통해 전해졌다. “하은, 솔직히 말해. 그 계약서에 네가 관여한 이유가 뭐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하은은 그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창밖 네온 불빛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비췄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 회사에 도착하면…”

민준이 앞좌석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그 손 치워. 하은, 너 지금 정신 나갔어?”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손이 코트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수진이 뒷좌석에서 숨을 삼켰다. “민준 씨,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에요.” 성호는 창문을 내리며 담배를 물었다. 연기 냄새가 차 안으로 퍼졌다.

차가 회사 건물 앞에 멈췄다. 24층 사장실 불빛이 밤하늘을 밝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하은은 진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김상현이 “하은 씨, 이 서류가 진짜라면 네 아버지 회사가 위험해질 거야”라고 속삭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김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정장 소매에서 커피 향이 났다. “들어와. 사장님이 직접 심문하신다.” 그들은 긴 복도를 걸었다.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사장실 문 앞에서 진우가 멈췄다. “하은, 여기서 끝낼 수 없어.” 그의 눈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며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장 이현수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이 하은의 얼굴을 비췄다. “하은 씨, 이 파일 설명해 보시지. 아버지 회사와 연결된 계약 조작, 네가 2년 전부터 알고 있었나?”

하은은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손가락을 베듯 날카로웠다.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조작한 거예요.” 진우가 그녀 옆에 섰다.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그 계약은 제 전 회사가 사기를 치려던 거였고, 하은 선배는 검토만 했을 뿐입니다.”

사장이 웃으며 태블릿을 돌렸다.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하은의 아버지가 진우의 전 회사 사장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건… 제가 찍은 게 아니에요.” 하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준이 앞으로 나서며 “사장님, 이건 하은이 진우를 유혹한 증거입니다. 해고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수진은 뒤에서 손을 꼭 쥐었다. 성호는 미소를 지으며 “아직 끝이 아니죠. 김상현 차장님이 가져온 서류가 진짜라면…”이라고 덧붙였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서울 야경이 펼쳐졌다. “내일 아침까지 두 사람의 해명을 듣겠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복도에서 새로운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최유진이 들어섰다. 그녀의 가죽 가방에서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사장님, 방금 새로운 증거가 도착했습니다. 하은 씨가 진우 씨와 2년 전부터 사적으로 만난 기록입니다. 그리고…” 최유진이 USB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안에 하은 씨의 아버지가 민준 씨와 공모한 흔적도 들어 있습니다.”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최유진을 노려보며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외쳤다. 하은은 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사장이 USB를 집어 들며 “열어 보지”라고 명령했다. 화면이 켜지며 새로운 파일이 떠올랐다. 민준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계약 조작에 관여한 흔적과, 하은을 진우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성호와 공모한 기록이었다.

수진이 숨을 들이마셨다. “민준 씨… 설마.” 진우가 민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이게 다 네 짓이었어?” 그의 주석이 불끈 쥐어졌다.

하은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진우, 지금은…”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자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민준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증거가 뭐 어때? 회사에서 너희 둘 다 끝장날 거야.”

사장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모두 내일 아침 9시까지 대기하라. 그때까지 추가 증거가 나오면…”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문틈으로 보이는 실루엣은 낯선 여성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철이 불빛에 번들거렸다.

하은의 심장이 멎을 듯 뛰었다. 진우가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또 누구지?”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어와”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며 여자가 들어섰다. 그녀는 하은의 대학 동기이자 경쟁사 법무팀장인 최유진의 동료였다. “진우 씨, 네가 하은 씨를 처음 만난 날, 그 계약은 이미 조작되어 있었어. 그런데 하은 씨, 네가 그걸 알고도 진우 씨를 끌어들인 이유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메시지는 익명의 번호였다. ‘아버지가 지금 회사로 오고 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 둘 다 끝이다.’

진우가 하은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누구야? 또 누가…” 하은은 메시지를 지우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시작이다”라고 낮게 말했다.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버지 하정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은, 문 열어라. 이제 모든 걸 끝내자.”

진우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점점 얼어붙었다. 새로운 위기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