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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소리가 호텔 문을 두드리며 밤의 정적을 찢었다. 하은의 손가락이 문고리에 닿자마자 차가운 금속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진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몸을 앞으로 당겼고, 그의 체온이 코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열지 마.” 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문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은, 이 문 열지 않으면 내가 부숴 버린다. 네가 2년 전부터 숨겨온 그 계약서, 지금 당장 확인할 테니까.”
하은은 숨을 삼키며 손을 떼었다.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고, 손바닥이 문틱에 스치며 미세한 마찰음이 났다. 수진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가방을 움켜쥐었다. 성호는 담배를 문 채 창가에 기대어 서서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군. 아버지까지 나타나다니.” 성호가 연기를 내뱉었다. “하은 선배, 이제 진짜 말할 때가 됐네.”
진우가 수진을 노려보며 한 걸음 다가갔다. “너, 이 상황을 알고 있었지? 파일을 넘긴 게 네가 아니라, 네가 민준이랑 짜고 한 거였어?”
수진의 손이 목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니야. 나는… 하은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아버님께서 먼저 연락이 왔어. 그 계약이 하은 씨 가족 회사와 연결된 거라고.”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하은은 진우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하이힐이 카펫을 밟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민준이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열어. 이제 끝장날 테니까.” 민준의 말투가 차가웠다.
하은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아버지 하정수가 들어섰다. 그의 정장 소매에서 가죽 냄새가 퍼졌고,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는 진우의 전 상사 박철민이었다. 그는 서류철을 테이블에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진우. 네가 하은 씨를 끌어들인 대가를 치를 시간이야.”
진우의 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철민 형,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그 계약 조작, 네가 지시한 거였잖아.”
하정수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눈이 하은을 향했다. “네가 진우를 처음 본 날, 그 카페에서. 네가 그 남자 사진을 몰래 찍은 이유가 뭔지 이제 말해라. 아버지 회사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나?”
하은의 손등이 저려왔다. 그녀는 진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버지, 그건… 제가 몰랐던 일이에요. 그 파일은 제가 검토만 했을 뿐이라고요.”
박철민이 서류를 펼쳤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 기록 보이지? 하은 씨가 진우 씨를 2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만난 흔적. 그리고 그 만남이 네 아버지 지시로 시작된 거야. 하은 씨, 너는 진우를 이용해 계약을 숨기려 했지.”
진우가 하은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사실이야? 네가 날 찾아온 게… 그 계약 때문이었어?”
하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발이 뒤로 물러섰고, 등줄기가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수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은아, 이제 솔직해져. 성호가 나한테도 그걸 말했어. 네가 아버님한테 진우 씨를 소개한 이유가…”
성호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맞아. 하은 선배 아버지가 민준 씨한테 연락해서, 하은을 스캔들로 몰아가라고 했지. 그래야 경쟁사 계약이 안전해지니까.”
민준이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내가 한 일이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하은, 네가 진우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모든 게 꼬였지.”
방 안 침묵이 길어졌다. 하은은 진우의 손을 놓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제가 그 계약을 막으려 했는데…”
하정수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네가 막으려 했던 게 아니야. 네가 그걸 이용해 진우를 회사에 끌어들인 거지. 내일 사장실에서 이걸 공개하면, 너희 둘 다 끝이다.”
진우가 주먹을 쥐었다. “그럼 끝내라. 하지만 하은은 건드리지 마.”
박철민이 전화를 들었다. “사장님, 지금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 다 데려가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하은은 창가로 다가갔다. 네온 불빛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비췄다. 진우가 그녀의 뒤를 따라오며 속삭였다. “하은, 믿어.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런데… 지금도 너만 있으면 돼.”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진우, 미안해.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하은, 나야. 최유진. 아버님께서 부르셨어.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은의 손이 창틀을 움켜쥐었다. 진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성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비볐다. 민준은 구석에서 이를 갈았다.
방 안으로 최유진이 들어섰다. 그녀의 가죽 가방에서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이 USB 안에 진짜 기록이 있어. 하은, 네가 진우 씨를 2년 전부터 지켜본 이유가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어. 너는 그 계약을 이용해 진우를 회사에서 몰아내려 했지.”
하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럴 리 없어. 나는…”
진우가 그녀를 밀어냈다. “설명해. 지금 당장.”
최유진이 USB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켜지며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하은이 2년 전 진우의 전 회사에서 계약서를 조작하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손이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이 선명했다.
“이게… 내가 한 일이야?” 하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한 일이 맞다. 그런데 진우, 네가 그걸 막으려다 오히려 하은이 너를 보호한 거지. 내일 아침, 이 영상이 공개되면 너희 관계는 끝장이다.”
진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날 지켜본 거였어? 이용하기 위해서?”
하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그녀는 손으로 닦지 않았다. 수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은아, 이제 끝내자. 아버님 말씀대로…”
성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이 영상, 누가 찍은 건지 아나? 민준 씨가 하은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거지.”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성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닥쳐!”
진우가 민준의 팔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 하은, 우리 여기서 나가자.”
방 문이 다시 열리며 박 과장이 들어섰다. “사장님 지시로 왔습니다. 두 사람, 지금 바로 회사로 가시죠. 사장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하은은 진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아버지가 문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라. 내일 아침, 모든 게 드러날 테니까.”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로비에서 하은은 진우의 눈을 피했다. “진우, 믿어줘. 나는…”
진우가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았다. “지금은 말하지 마. 여기서 끝낼 수 없어.”
로비 문이 열리며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익숙한 실루엣. 하은의 심장이 멎을 듯 뛰었다. 수진이 “누구지?”라고 물었다.
그림자가 가까워지며 목소리가 울렸다. “하은, 기다려. 내가… 진짜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진우의 얼굴이 굳어갔다. 새로운 위기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