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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화: 피로 새긴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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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한 방울의 선혈이 새하얀 눈밭 위로 떨어지는 순간, 내 세상의 모든 색이 빛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지탱하던 모든 믿음, 내가 돌아온 이유, 내 복수의 정당성까지도 그 핏방울과 함께 얼어붙은 대지 아래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저주. 저주였다.
나를 옭아매고, 내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바로 그 끔찍한 주술의 일부. 내 어머니, 아델리아는 그 저주를 지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등 뒤에, 자신의 피로 그 저주를 새기고 있었다. 자애롭던 미소, 다정하던 손길, 나를 끌어안아 주던 따스한 품. 그 모든 기억 위로, 핏빛 주술을 새기는 어머니의 냉정한 얼굴이 겹쳐지며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환영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눈보라 치던 설원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며, 두 어머니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 환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야…."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쉰 바람 소리에 가까웠다.

"거짓말이야, 이건…."

이것 역시 붉은 달의 함정인가? 아니면 탑의 주인이 보여주는 악랄한 장난인가? 하지만 내 본능이 알고 있었다. 방금 내가 본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얼어붙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을.

환영 속 레아의 등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고통을 참아내듯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리아를 향해 끄덕여 보이던 그 단단한 신뢰의 눈빛을. 그것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합의였다.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방식의 맹세였다.

"대체… 대체 뭘 한 거지?"

내 옆에서, 카엘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환영이 사라진 허공을 향한 채,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가 짊어진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것과 똑같은 혼란과 배신감을 읽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무너진 자리를 채운 것은 동질감이 아닌,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였다.

"네 어미는 대체 뭘 한 거지? 내 어머니가 저런 짓을 하도록, 왜 옆에서 보고만 있었던 거냐고!"

내 비난은 화살이 되어 그에게 날아갔다. 그는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전하… 그건…."

"알고 있었나? 네 어미가 저런 저주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가?"

"나도 몰랐소! 맹세컨대, 나 역시 지금 처음 본 광경이란 말이오! 우리 어머니는…! 그럴 분이 아니오!"

카엘의 외침이 허공에 부딪혀 부서졌다. 그 순간, 우리를 감싸고 있던 과거의 환영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세상의 모든 빛과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더 이상 눈보라 치는 설원 위가 아니었다.

사방이 매끄러운 수정 벽으로 둘러싸인, 끝을 알 수 없는 나선형 계단 위였다. 아래는 짙은 어둠이었고, 위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까마득한 천장이었다. 공기는 수백 년 묵은 먼지와 오존 냄새로 가득했고,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숨소리가 기묘한 메아리가 되어 공간을 채웠다. 탑의 내부에 들어온 것이다.

***

우리는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격렬한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겁고 숨 막히는 침묵만이 우리 사이를 짓눌렀다. 동맹도, 공범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야만 하는, 서로의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운 두 명의 죄수와도 같았다.

계단은 끝이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수정 벽이 희미한 빛을 내며 우리의 모습을 비췄다. 하지만 그 모습은 현재의 우리가 아니었다. 회귀하기 전, 반역자의 칼에 쓰러지던 스무 살의 나. 북부의 늑대들을 이끌고 제국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던 젊은 시절의 카엘. 탑은 우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를 끄집어내, 조롱하듯 눈앞에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 환영들을 무시하며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까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레아의 등에 저주식을 새기던 그 냉정한 얼굴이.

"네 어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지?"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내 목소리는 계단참의 찬 공기처럼 메마르게 울렸다.

"자신의 피로 봉인을 걸고, 등에는 저주를 새겼어.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카엘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저 위, 아득한 빛을 향해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소. 때로는 가장 끔찍한 독이, 다른 독을 막는 유일한 해독제가 되기도 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아마도…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일종의 ‘그릇’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겠지. 정원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일부 새겨 넣어, 저주 그 자체를 속이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오. 수호자나 붉은 달이 ‘정원의 심장’의 행방을 쫓지 못하도록, 더 강력하고 본질적인 저주의 일부를 미끼로 삼아 스스로 표적이 된 것일지도."

그의 추측은 소름 끼치도록 논리적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끔찍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저주를 기만한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동반하는 길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희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어머니가 그 끔찍한 계획의 공모자였다는 사실이, 내 모든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래서, 네 어머니는 숭고한 희생자고, 내 어머니는 그 희생을 강요한 악당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내 비틀린 질문에, 카엘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아니오, 전하. 나는… 두 분 모두 피해자였다고 생각하오. 거대한 악의 앞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를 골라야만 했던 가여운 사람들이었을 뿐."

"가여운 사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 어머니는 제국의 황후였어. 세상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뭐가 가여워서, 그런 끔찍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는 거지?"

내 질문에, 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계단을 오를수록 공기는 점점 더 희박해졌고, 압박감은 강해졌다. 마치 탑 전체가 거대한 심해와도 같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내 다리가 후들거리며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마침내 계단의 끝이 보였다. 거대하고 둥근 아치형 문. 문 너머에서는 아주 희미하고 따스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카엘이 내 뒤를 따랐다. 지금껏 우리를 짓누르던 모든 의문, 내 어머니의 진실, 그리고 저주의 모든 비밀이 저 문 너머에 있었다. 나는 화상 입은 오른손을 들어, 차갑고 무거운 문을 밀었다.

***

문 너머의 공간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곳은 서재도, 마법사의 연구실도 아니었다. 밤하늘 그 자체를 옮겨놓은 듯한, 거대하고 둥근 공간이었다. 천장과 벽의 구분 없이, 온 공간에 은하수와 성운이 흐르고 있었고, 수백, 수천 개의 빛나는 구체들이 행성처럼 제 궤도를 따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발밑은 단단한 흑요석 바닥이었지만, 그 아래로도 아득한 우주가 펼쳐져 있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기는 따스하고 향긋했다. 라일락과 묵직한 종이 냄새가 뒤섞인, 묘하게 그리운 향기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 그분의 서재에서 나던 향기와 똑같았다.

나는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공간의 중앙에는 흑단으로 만든 거대한 원형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펼쳐진 낡은 책 한 권이 유일하게 이 공간이 누군가의 서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침묵의 현자는 어디에 있지?”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내 목소리는 별들 사이에 부드럽게 흡수되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겠지.”

카엘이 내 옆으로 다가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의 단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였다.

책상 뒤, 가장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늦었구나, 황녀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늙은 현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이곳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상냥하고 맑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밤색 머리카락,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그리고 내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갈색 눈동자.

그녀는 더 이상 허름한 궁녀 복장이 아니었다. 별빛을 수놓은 듯한 짙은 남색의 실크 드레스는 그녀의 몸을 우아하게 감쌌고, 그 손에는 흑요석으로 만든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그 얼굴만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주고, 나를 배신하고, 붉은 달에게 나를 팔아넘겼던 여자.

“마리아….”

내 입술 사이로, 증오로 가득 찬 이름이 흘러나왔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카엘이 나를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불신으로 굳어 있었다.

마리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과거 내가 보았던 상냥한 미소와 똑같았지만, 이제는 그 안에 숨겨진 칼날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오랜만이네, 카엘. 아직도 그렇게 황녀님 뒤에 숨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녀의 말투는 더 이상 어눌하지 않았다. 완벽하고 유창한 제국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의 현자는 어디 있나!"

내가 소리쳤다. 내 안의 분노가 들끓어올라,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마리아는 그런 나를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톡, 하고 쳤다. 그 순간, 우리 뒤의 거대한 아치형 문이 굉음과 함께 닫혔다. 우리를 비추던 수천 개의 별들이 일제히 빛을 잃고, 섬뜩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따스하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라일락 향기는 사라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현자님을 뵙겠다고? 가엾어라."

마리아는 미소를 지운 채,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 역시 어리석은 기대를 품고 이곳에 왔구나."

그녀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바닥의 흑요석 위로 붉은 저주 문양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진실을 알려줄까, 릴리아? 이 탑의 주인, 침묵의 현자는 너희 어머니들의 위험한 장난질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셨지. 그래서 벌을 내리셨단다. ‘배신자’라는 이름의 낙인을."

마리아의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그리고 그 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 탑은 현자님을 뵙기 위한 관문이 아니야. 자격 없는 배신자의 자식들을 영원히 가두기 위한, 거대한 무덤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