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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영혼을 가득 채우며 자신을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렸던, 루아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마치 물에 씻겨나가는 잉크처럼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온몸의 혈액이 차가운 돌로 변하는 듯한 끔찍한 감각.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 절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버린 껍데기만 남아, 거대한 공허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자하르의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그의 동공 전체를 칠흑으로 물들였다. 그를 지탱하던 루아의 손길이, 이제는 영혼을 갉아먹는 독처럼 느껴졌다.
"왕자님...? 눈이..."
루아는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거세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심연의 눈이었다.
"아아, 이 얼마나 장엄한가."
리안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붕괴하는 정신 세계에 울려 퍼졌다.
"희망의 정점에서 피어나는 절대적인 허무. 이졸데가 평생을 바쳐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완벽한 예술이야. 보아라, 용의 왕자여. 그것이 네 저주의 진정한 얼굴, '공허의 낙인(烙印)'이다."
자하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아지랑이가 주변의 빛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루아가 만들어냈던 따뜻한 공간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소멸의 힘이었다.
"싫어... 싫다..."
그의 입에서 간신히 새어 나온 신음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사라져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루아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온기. 하지만 붙잡으려 할수록, 그 기억들은 더욱 빠르게 재가 되어 흩어졌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 저주를 키우는 가장 완벽한 연료였던 것이다.
"안 돼... 루아, 나에게서... 떨어져!"
자하르는 남은 마지막 이성을 쥐어짜 절규했다. 그는 루아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의 손길에는 이전과 같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닿은 루아의 어깨 부분에서, 옷감의 색이 미세하게 바래는 것이 보였다. 생기가 빨려나가는 듯한 섬뜩한 현상이었다.
"이제 와서 밀어낸들 소용없다. 계약은 이미 성립되었으니."
리안의 비웃음과 함께, 그들을 둘러싼 정신 세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칠흑 같은 현실의 어둠이 그들을 다시 집어삼켰다.
***
차가운 흙냄새, 폐부를 에는 밤공기, 그리고 귓가를 때리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
루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었다. 방금 전의 경험은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검게 그을린 고목 옆에 주저앉아 있었고, 눈앞에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자하르가 있었다.
"크윽... 아아아!"
자하르는 땅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은 더 이상 정신 세계의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를 지닌 마력의 폭풍이 되어, 주변의 모든 것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가 스친 풀잎들은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고 회색으로 말라 비틀어졌고, 공기 중의 수분은 그의 주위에서 얼어붙어 하얀 서리가 되어 땅에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리안은 조금 떨어진 나무 그림자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예술가처럼 만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런 짓을..."
루아는 이를 갈며 리안을 노려보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지만, 심장 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질문이 틀렸지, 엘라라의 아이.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네가 한 것이지."
리안은 우아하게 손짓하며 자하르를 가리켰다.
"너의 그 숭고한 사랑이, 그의 마지막 인간성을 옭아매던 족쇄를 끊어버린 거야. 너는 그를 구원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안에 잠들어 있던 가장 끔찍한 것을 깨우고 말았어.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저 위대한 파멸의 탄생에, 네가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
그의 말은 칼날이 되어 루아의 심장을 후벼 팠다. 자신의 선택이, 자신의 사랑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잔인한 진실이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냥꾼이었다. 덫에 걸렸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명이 아니라 덫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성소가 무너진 것도, '심연의 메아리'인 당신이 깨어난 것도... 전부 당신 계획의 일부였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리안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성소의 붕괴는 예상 밖의 선물이었지. 덕분에 천 년 만에 갑갑한 봉인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하르의 저주가 지닌 가능성을 눈여겨본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이졸데는 그저 그를 망가진 장난감 취급했지만, 나는 보았지. 고통과 사랑이 뒤섞일 때 탄생하는 가장 순수한 공허의 힘을. 나는 그저... 너라는 완벽한 촉매가 나타나길 기다렸을 뿐이야."
그의 말에서, 루아는 이 거대한 비극의 전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졸데의 저주, 카엘의 추격, 그리고 리안의 계략.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자하르를 파멸이라는 종착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때, 괴로워하던 자하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는 천천히, 삐걱거리는 인형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향해 있었다.
"자하르... 왕자님?"
루아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마치 정교하게 깎아 만든 가면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닿는 땅마다, 하얀 서리가 카펫처럼 깔렸다.
"멈춰요! 오지 마세요!"
루아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허무의 기운이 숨을 막았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조각나는 듯한 공포였다.
"아, 드디어 안정을 찾아가는군."
리안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단계는 성공이야. 이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 대신, 감정 자체를 지워버리는 법을 터득하게 될 거다. 그 끝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오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완벽한 존재가 탄생하겠지.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도록 할까. 위대한 탄생의 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들이 오고 있으니."
리안은 숲의 어둠을 향해 턱짓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 저편에서 땅을 울리는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두 개의 거대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엘과 발레리우스였다.
"이... 이 사악한 마력은 대체...!"
발레리우스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카엘 역시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긴장한 채 워해머를 고쳐 쥐었다. 그들은 폭주하던 자하르를 쫓아왔지만, 지금 그들 눈앞에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리안은 그들의 등장을 끝으로, 소리 없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이.
이제 공터에는 네 사람만이 남았다. 이성을 잃고 다가오는 자하르. 공포에 질려 그에게서 도망치는 루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재앙의 현신을 마주한 두 명의 용족 수호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최악의 상황이었다.
***
"멈춰라, 왕자 전하! 더 이상 그 불길한 힘에 잠식당해서는 안 됩니다!"
발레리우스가 소리치며 앞을 가로막았지만, 자하르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오직 눈앞의 루아만을 인식하고, 그녀를 향해 기계적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젠장, 말이 통하지 않아! 저 인간 계집이 원흉이다! 저 계집부터 처리해야 해!"
카엘은 이성을 잃고 루아를 향해 워해머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루아는 결심했다. 이대로는 모두 죽는다. 자하르의 손에 죽든, 용족의 손에 죽든. 그녀는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오히려 자하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왕자님!"
그녀는 그의 텅 빈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강하게 밀쳤다.
"제정신으로 돌아와요! 당신은 이런 괴물이 아니잖아! 나를 기억해요! 루아를! 당신이... 당신이 사랑한다고 했던 여자란 말이에요!"
그녀의 절규가, 그의 멈춰버린 심장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킨 것일까. 자하르의 검은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달싹였다.
"...루... 아..."
그것은 거의 소리가 되지 못한, 바람 같은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가 아직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한 줌의 희망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하르의 몸 안에서 억제되어 있던 공허의 마력이, 그의 희미한 감정의 동요를 기폭제 삼아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제어되지 않은, 순수한 소멸의 파동이었다.
콰아아아아아-!
검은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발레리우스와 카엘은 비명을 지르며 마력 방패를 펼쳤지만, 방패는 닿는 순간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동의 가장 중심에, 루아가 서 있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죽음이 그녀를 덮치는 순간.
번쩍!
그녀의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황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아니었다. 모든 어둠을 태워버릴 듯한, 태양의 권능과도 같은 맹렬하고 따뜻한 빛이었다.
황금빛은 루아의 전신을 감싸는 보호막이 되어, 그녀를 덮치던 검은 파동을 막아냈다. 아니, 막아내는 것을 넘어섰다.
황금빛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자하르에게서 뿜어져 나온 공허의 마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 검은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숨을 멈췄다. 용족 최강의 수호자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저주받은 용의 소멸의 힘을, 태초의 인간 여인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작은 유품이...
그 검은 공허를...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