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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어둠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루아의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은, 자애로운 온기를 가장한 굶주린 포식자였다. 빛은 촉수처럼 뻗어 나가 자하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공허의 마력을 낚아채고, 찢고,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칠흑 같은 허무의 기운이 황금빛으로 끌려 들어갈 때마다, 유리가 갈라지는 듯한 섬뜩한 파열음이 고막을 찔렀다.
"크으으윽... 아아악!"
자하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더 이상 텅 빈 괴물의 포효가 아니었다. 영혼이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처절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비명이었다. 그의 검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본래의 위태로운 푸른빛을 되찾으려 발버둥 쳤다. 공허가 빠져나간 자리를, 천 년간 억눌려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채우며 그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루아를 지켜야 한다는 사랑, 그녀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책감,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시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 감정의 해일이 그의 내면을 휩쓸자, 그는 차라리 공허의 무감각 속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이 무슨..."
카엘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워해머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용족 최강의 수호자인 자신조차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었던 저 절대적인 소멸의 힘이, 고작 인간 계집의 목걸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공포보다 더 큰 것은 모욕감이었다.
반면 발레리우스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아주 희미한 경외심마저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하르가 아닌, 빛의 근원인 루아의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태양의 조각을 녹여 만든 듯한 그 순수한 황금빛. 용족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나 언급되던, 잊혀진 신화 속의 권능.
‘설마... 태초의 계약... 엘라라의 눈물인가...’
일방적인 포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하르의 몸에서 더 이상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지 않게 되자, 펜던트의 광휘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마지막 한 줄기의 공허마저 빨아들인 펜던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금속 장신구로 돌아왔고, 숲의 공터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든 힘을 빼앗긴 자하르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왕자님!"
루아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쓰러지는 그의 몸을 간신히 부축했다. 그의 체중이 고스란히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루아... 루아..."
그는 헐떡이는 숨 사이로, 오직 그녀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제 완전히 제 색을 되찾아 있었지만, 짙은 고통과 안도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뒤섞여 위태롭게 흔들렸다.
루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그의 뺨을 적셨다. 돌아왔다. 그녀가 알던,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 하던 바보 같은 그가 돌아왔다. 그녀는 그를 부축한 팔에 힘을 주며, 그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그녀의 위로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거기까지다, 인간."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짧은 재회를 갈랐다. 정신을 차린 카엘이 어느새 그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투구 속 눈빛은 의심과 적의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왕자 전하에게서 떨어져라. 그리고 그 요사스러운 물건을 이리 내놔."
그의 시선은 루아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저것이 왕자를 구원한 성물이 아니라, 왕자를 무력화시킨 미지의 흉기일 뿐이었다.
"싫습니다."
루아는 자하르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카엘을 쏘아보았다.
"이분은 지금 안정이 필요해요. 당신들이 또다시 그를 위협하게 둘 수는 없어요."
"네년이 감히 용족 수호자에게 명령을 해? 왕자 전하를 현혹시킨 것도 모자라!"
카엘이 분노하며 워해머를 치켜들었다. 루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그만하게, 카엘."
발레리우스가 그의 팔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신중한 눈으로 루아와, 그녀의 품에 안긴 자하르,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희미한 온기를 내뿜는 펜던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진정하게. 저 여인은 왕자 전하를 해하려는 것이 아닐세. 오히려... 우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하를 구했지."
"구했다고? 저건 흑마법이나 다름없어! 왕자 전하의 용의 힘을 모조리 빨아들였다고! 저 계집이 모든 일의 원흉이야!"
"그렇기에 더욱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발레리우스는 카엘을 힘으로 제압하며, 루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위압적인 카엘과 달리, 최대한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가씨. 그 목에 건 펜던트는... 어디서 얻은 것인가? 가문의 유품인가?"
루아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유품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만 들었어요."
"역시..."
발레리우스는 무언가 확신한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자하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왕자 전하, 심신이 편치 않으시겠지만 잠시 여쭙겠습니다. 방금 전 전하를 잠식했던 그 힘은... 이졸데 님께서 내리신 저주와는 다른 것입니까?"
자하르는 루아의 어깨에 기댄 채,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졸데의 저주가... 더 끔찍한 것을 깨우는... 열쇠였을 뿐이다. '심연의 메아리'라는 고대의 존재가... 내 절망을 먹고... '공허의 낙인'을 새겼다."
"공허의 낙인...!"
발레리우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이름은 용족의 금서(禁書)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된, 세상의 종말과 함께 언급되는 재앙의 이름이었다.
"맙소사... 성소의 붕괴가 봉인을 건드린 것이 아니었어. 왕자 전하의 저주 그 자체가 봉인을 내부에서부터 좀먹고 있었던 게군. 이졸데 님은 대체 무슨 짓을..."
그는 이 모든 비극을 설계한 여왕을 향한 원망과, 눈앞의 재앙을 마주한 장수의 무력감 사이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고 있었다. 엘라라의 후손, 태초의 계약을 상징하는 펜던트, 그리고 용족의 왕가에 내려진 저주와 공허의 낙인.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운명의 모든 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끔찍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상황이 어찌 됐든, 왕자 전하는 용족의 땅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 인간 계집 또한 이 사태의 중요 참고인으로서 함께 가야겠소."
카엘이 다시 끼어들었다.
"헛소리."
자하르가 힘겹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나 또한... 네놈들을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자하르는 루아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마력은 바닥났고 온몸의 근육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눈빛만은 부러지지 않은 검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루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두 명의 용족 수호자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이 이상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내 모든 것을 걸고 네놈들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이다."
"하! 지금 그 꼴로 허세를 부리시는 겁니까!"
카엘이 비웃으며 워해머를 바닥에 쿵, 찧었다. 땅이 작게 울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공기를 짓눌렀다. 발레리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최악의 경우 무력으로라도 두 사람을 제압할 방법을 가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루아의 입에서 당황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러지...?"
그녀의 목에 걸린 초승달 펜던트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의 눈부신 황금빛이 아니었다. 펜던트의 중심에서부터, 먹물 한 방울이 물에 퍼지듯 검은 점 하나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순수한 황금빛을 오염시키듯 검은 실핏줄을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펜던트는 미세하게 진동하며, 차갑게 식어갔다.
"안 돼..."
그 광경을 본 발레리우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펜던트가... 공허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었어..."
그의 절망적인 속삭임에, 자하르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저주를... 삼킨 것이다. 자신의 안에... 가둔 것이야."
황금빛 성물은 이제 없었다. 그 자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독을 품은 감옥이, 루아의 심장 바로 위에서 불길한 맥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얻은 구원은, 더 깊고 어두운 절망으로 향하는 입구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