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작업실 안, 붓이 캔버스를 긁는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울렸다. 이진수는 숨을 죽이고 손끝에 힘을 실었다. 새벽 3시,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가 그의 땀에 젖은 목덜미를 스쳤다. 캔버스 위 여인의 눈동자가 점점 더 생생해졌다. 그 눈빛은 살아 있는 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응시를 넘어… 그를 꿰뚫는 듯했다. 진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붓 끝이 캔버스를 벗어나 허공을 휘저었다.
“뭐야, 이 느낌은…”
그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작업실의 낡은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며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캔버스 속 여인의 얼굴은 완벽에 가까웠다. 부드러운 곡선의 턱선,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 진수는 그 눈동자에 붉은 기운을 살짝 얹었는데, 그 순간부터 그림이 이상해졌다. 마치 그림이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진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피로 때문이겠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다음 주에 있을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밤낮없이 붓을 들었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는 다시 캔버스를 노려봤다. 여인의 입술이 방금 전보다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미소 짓는 것처럼.
“미쳤나 봐.”
그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업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에 몸이 굳었다. 바람 때문일까? 창문은 닫혀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틈 사이로 어둠만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 아니, 더 미세한, 스치는 소리였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캔버스 속 여인의 눈이 깜빡였다.
진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질 뻔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오를 듯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캔버스를 다시 봤다. 여인의 눈은 그대로였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깜빡임은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봤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왔다. 그는 붓을 던지듯 내려놓고 작업실을 뛰쳐나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좁은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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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적한 골목, 낡은 빌딩 3층에 자리 잡은 진수의 작업실은 언제나 고요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수는 작업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오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거리는 새벽이라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며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진수야, 왜 이렇게 급하게 나왔어?”
골목 끝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가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강민혁이었다. 검은 코트 차림에 손에는 커피 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진수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민혁이 형? 새벽에 여기서 뭐해?”
진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민혁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 캔을 흔들었다.
“너 작업실 근처 지나가다 불 켜져 있는 거 보니까, 혹시나 해서 올라가 보려던 참이었지. 근데 네가 먼저 튀어나오네. 무슨 일 있어?”
“아… 별일 없어. 그냥 좀 피곤해서.”
진수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민혁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진수를 훑어봤다. 그 시선이 너무 날카로워 진수는 눈을 피했다.
“피곤한 얼굴이긴 하다. 근데,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새벽 공기 차갑잖아.”
민혁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진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는 대충 손을 흔들며 말을 돌렸다.
“전시회 준비하느라 좀 무리했나 봐. 형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야? 회사 일은?”
“일? 그거야 늘 있는 거지. 그냥… 네가 좀 걱정돼서.”
민혁이 낮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진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민혁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더 묻지 않고 커피 캔을 내밀었다.
“한 모금 마셔. 정신 좀 차리게.”
진수는 망설이다 캔을 받아들었다. 따뜻한 캔이 손바닥을 데웠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캔버스 속 여인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민혁이 정말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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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진수는 작업실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래된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그의 스승, 김선생이 자주 머무는 곳이었다. 카페 문을 열자 낡은 나무 냄새와 커피 원두를 볶는 향이 섞여 코를 찔렀다.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난 노인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진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진수야, 이리 와!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니?”
김선생의 목소리는 느리고 부드러웠다. 진수는 테이블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그린 그림이… 이상해요.”
김선생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어떤 식으로?”
“그림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저를 보고, 움직이고… 심지어 눈을 깜빡이는 것 같았어요.”
진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김선생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이 커피 잔을 쥐고 있던 힘이 살짝 강해졌다. 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림, 누구를 그린 거지?”
“그냥… 상상 속 인물이요. 특정한 모델은 없어요. 근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김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무겁게 변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진수야. 네가 그린 그림이 정말로 ‘살아 있다’고 느꼈다면… 그건 네 상상이 아니야. 네 안에 잠재된 힘이 깨어나고 있는 거야.”
“힘…이요?”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김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림 속에 영혼을 가두는 저주… 아니,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네가 그린 그림이 사람을 끌어당기거나, 심지어 그들을 삼키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건 그 힘이 발현된 거야.”
진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저주? 능력? 그런 말은 김선생이 가끔 술에 취했을 때 농담처럼 하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그 눈빛은 진지했다. 진수의 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그린 그림이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김선생은 대답 대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침묵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카페 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진수는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벌컥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문틈으로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들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따뜻했지만, 진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진수 씨… 맞죠?”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조용했다. 진수는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쥔 작은 스케치북이 눈에 띄었다. 그 스케치북의 표지에는 진수가 몇 년 전 전시회에서 그린 그림의 작은 복사본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송아름이라고 해요. 당신의 그림 때문에… 제 오빠가 사라졌어요.”
진수의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사라졌다? 그의 그림 때문에? 김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벌써 시작된 건가…”
아름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스케치북을 쥔 채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의 그림이 정말로 누군가를 해쳤다면? 그 여인의 눈빛이, 캔버스 속에서 깜빡이던 그 눈이 진짜였다면?
카페 안의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진수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어떤 질문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름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발… 오빠를 찾아주세요. 당신이 그린 그림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야 해요.”
그 순간, 진수의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창문 너머로,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캔버스 속 여인의 눈과 똑같은, 붉은 기운이 도는 그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