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새벽빛이 남겨진 파도의 흔적 위로 번지고 있었다. 암릉 사이로 던져지는 부서진 파도의 소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남자는 모래사장을 뒤엉켜 걷다가 발끝에 닿은 차가운 물결에 몸을 움츠렸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자 본능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모래 위에 쌓인 조각들이 깨어난 듯, 햇살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눈에 익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 어디쯤 봉인된 듯한 욱할 일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그가 서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여자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어색함을 뚫고 스며들었다.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고운 목소리였지만, 그의 가슴은 뭔가 가라앉는 듯했다. 저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 느낌.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난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남자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흉터 난 손목 위로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당신, 혹시 기억나지 않나요?"
여자는 손목을 가리키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물음 속에는 기묘한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뭐가 말이야?"
여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햇살이 그녀의 금발을 부드럽게 감싸며 윤곽을 만들었다.
"오래전 이곳에 왔던 적이 있던 것 같아요. 나도 처음엔 모든 게 흐릿했죠.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텅 빈 바다처럼 출렁였다. 모르겠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끌려가고 있었다.
"같이 걸을래요?"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조그만 미소 속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래, 뭐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 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길을 걷으며 모래사장은 새로운 이야기를 쥐고 있는 듯했다. 조그맣고 섬세한 조각들이 여전히 모래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적막 속에서, 잊혀진 문장들이 터져 나오려는 듯 일부러 눌려져 있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모래를 집어 올렸다. 밀어내듯, 미끄러지는 모래 알갱이들이 그의 발 앞에 쏟아졌다.
"하지만... 곧 모든 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고했다.
너무나 익숙한 두근거림이 그의 광대뼈를 따라 퍼졌다. 그는 왜인지 갑자기 불안함이 엄습했다.
"당신이 무얼 찾고 있는 건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과 같이 걸을 수 있다면 뭐라도 찾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 무엇도 아닌, 그 이외의 모든 것 같은 복잡한 느낌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속삭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가 자신의 질문을 끝까지 던지기 전에,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우릴 지켜보고 있어요."
그녀의 손이 그를 뒤로 데리고 갔다. 마른 나무 위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이질감을 더했다. 그 속에 숨겨진 위험성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순간, 오싹한 바람이 몰아쳤다.
"도망쳐야 하는 거야?" 그가 물었다.
여자는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은. 우리 먼저 알아봐야 해요. 저게 누구인지."
그 순간,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행동할 수 없었고,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듯했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겨진 기억의 조각들이 자신들을 이끌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모래사장은 고요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겠다는 듯이. 그러나 그 약속의 내용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남은 채였다.
"누구든 무엇을 하든,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녀가 다짐하듯 말했다.
바람이 불면서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 방해로 묘한 불안감이 던져졌지만 두 사람은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이 알아내야 할 것은 수많은 의문과 그가 대답할 수 없는 기억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각자가 품은 비밀이 드러날 준비가 되었다고 속삭이며, 그건 무엇보다도 강력한 함정으로 그들의 길을 더 긴장된 순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더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요."
목소리는 그들을 멈추게 했고, 신비로운 기운으로 뒤덮인 정적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