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섬광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은 경관이었으나, 내내 꿈에 그린 적이 있는 듯했다. 이준호는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높이 솟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맹렬하게 부딪히는 해수 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귀에 스며들었다.
발걸음을 한 걸음 뗄 때마다 그가 느낀 긴장감은 한층 더 그를 붙잡았다. 발 아래,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다른 박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낮고 거센 어조가 그의 등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이곳에 이르렀네, 준호."
그 목소리는 강민재였다. 민재는 그를 두르고 있는 맑은 체취가 감미롭게 스며드는 남루한 바람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은 여느 때처럼 위엄 있고, 드리운 그늘이 역광에서 길게 뻗어 있었다.
"여기서 얻게 될 선택은 네가 계속해서 피하던 것들이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민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물었다. 그의 눈길은 해변선 끝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준호에게로 옮겨졌다.
현실감이 끓어오르며 다시 한 번 그를 끌어올렸다. 이곳이 특별한 장소인 것도,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한 순간인 것도 논할 수 없었다.
"너야말로 나와서 나를 도와줄 건가?" 준호는 쏘아붙이듯 질문했다. 그의 손끝이 날카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뭔가가 있었다.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맞서려 해봤자 소용없을 거야, 준호." 민재가 뱉는 말은 칼처럼 날서 있었다, 날이 선 바람에 날린 먼지처럼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갇힌 자리. "안 되는 줄 알면서, 결국 또 이렇게 되고 말았군."
"그래도 난 널 따라올 수밖에 없어. 그 선택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 싶으니까." 준호는 그 말처럼 발걸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선택은 항상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나, 대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작은 깃발이 휘날리는 또 다른 장면 속, 시간이 이들 사이를 짓눌러왔다. 강민재는 초조해하였다. 목소리는 때때로 끊기면서도 자조적인 힘을 실었다.
"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결국 네가 가진 선택은 시간에 의해 결정될 테니까."
준호의 내면에서는 때늦은 설명들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그의 가슴팍 속에 끼워진 이 다리들은 그 스스로 구축한 영광스러움 속으로 곧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란 바닷물이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침식하듯, 그의 사유 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였다. 매듭은 불분명했으나, 준호는 자신만의 길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의 앞을 막아 서 있던 희미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것은 그림자 넘어로 조심스레 다가오는 서영이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잡혀가는 주마등의 순간처럼 천천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애달픈 호소력을 담고 있었다.
"준호, 내가 널 여태 간과했어. 하나의 기회뿐인 줄 몰랐어." 그녀의 목소리는 그와의 거리를 좁혀간 간격에서 흐르고 있었다.
서영은 그를 둘러싼 세상을 아이로니컬하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녀는 준호를 드러내며, 주변을 감싸듯이 둘러선 물질들이 그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맑고 투명한 결단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가 되었어," 준호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주름진 끝자락에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손을 내저었다 할지라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저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가 바람처럼 지나가듯이, 그의 선택은 이제 확연한 형체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침내 그 험난한 길을 걷기로 하며 제일 먼저 다리를 건너올 때, 더욱 새로운 모습을 띤 이야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재는 우울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숙이 아로새겨진 포부는 이 자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련하게 짝지어지던 그림자의 흐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자신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준호, 시간이란 결국 네가 길을 찾아갈 때 형성되는 거야." 그렇게 속삭인 민재는 등진 채로 자신의 독백을 밀어냈다. 볼 수 없었지만, 그에게마저도 그것은 어느 의미인지 알았어야 했다.
주위를 둘러싼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작은 밀물처럼 발걸음을 버텼던 그 순간, 준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놓칠 수 없는 결정과 맞닥뜨렸다.
"서영,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것을 알아내는 거야. 널 만나서 너무 다행이야."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순간, 준호는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뒤를 돌아보기 위한 계기를 만들어 갔다. 바람은 하늘을 뚫고 스치듯 지나치며 희미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저 한걸음, 그 길을 걸어나가서야 그가 진정한 의미의 그 다리를 건너리라 다짐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그와 함께 하며 밝게 펼쳐질 다음 이야기를 서사했다.
하지만 그 끝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점점 버거워지던 결단이 명확해지는 그 찰나에,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함께 운명이 걸려있었다. 준호의 향한 길은 이제, 더 막연한 의문 속으로 그의 발걸음을 계속해서 이끌고 있었다.
치열함의 시간들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밤하늘 속에서,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없이 거대한 채찍 속에 이끌리며, 그를 다시금 이 상황으로 떠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감정도 감춰진 채로 준호는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