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뚫고, 진우는 걷고 있었다. 발밑의 돌멩이가 작게 후각을 울리며, 그는 시선을 거리의 저편으로 고정했다. 얼음장 같던 사건 현장이 불이 붙은 듯 그의 내면을 달구고 있었다. 이곳에서 진정한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느껴졌다.
"난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진우의 속내를 드러낸 한 마디는 스스로에게조차 낯설었다. 옆에 있던 미래가 고개를 젖혔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약간 흐려져 있었다.
"우리가 진짜 찾고 있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한 바람결에 섞여 울린다. "너한텐 전부를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겠지."
진우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눈동자는 갈 길을 찾지 못한 채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벽화 속의 이야기를 본 적 있나?" 재하가 툭 던진 질문에 진우는 맞물린 눈꺼풀을 힘주어 깜박였다.
"사라져버린 역사가 우리를 호소한다는 그 얘기 말인가?" 진우의 대답에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겨진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길잡이가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진우의 심장이 힘을 잃은 듯 멎어버렸다. 온몸을 파고드는 싸릿처럼, 고통스레 짧은 숨을 내쉬면서도 진우는 발걸음을 겨우 붙잡았다. 손끝은 이미 눈앞에서 또렷해진 형체에 탄력을 얻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한층 더했다면 이 지점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수빈의 목소리가 지치고 조용히 이어졌다. 그의 시선은 진우의 손끝이 닿은 무언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벽처럼 쌓인 한 인물이 그림자 속에서 등장했다. 그의 얼굴을 감추는 후드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졌다. 그 눈빛 속에선 익히 보아왔던 감정들이 얽히고 있었다.
"누군가가 데이터에 접근했어," 그 인물은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는 긴장이 흐트러진 채 시선을 돌렸고, 내부에서는 긴장감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 필요는 없어." 얘기를 가로막은 재하는 빠르게 대응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야 할 건 분명히 여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을 압도한 채, 그곳에 서 있는 자의 실체가 도전하듯 검게 질린 시선을 던졌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이 흔들리려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린 합리적이 돼야 한다고," 그자가 조용히 말했다. "경계를 넘어가는 걸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어두운 길모퉁이 너머에서 신경을 울리는 전율이 일어났다. 그 길 끝에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이야기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그 문 너머엔 어떤 형체가 복잡하게 숨죽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이 밝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해." 미래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전해졌다. 그 사이 누군가의 발걸음이 빠르게 그들 가까이서 다가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치밀어올랐다.
"모든 걸 뒤로 미루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도 없어." 수빈은 숨을 고르며 덧붙였다. 그의 억양 속에는 가를 수 없는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럼, 어쩌면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말은 다 무효화되겠군." 진우가 씁쓸히 말했다. 보는 이 없는 그들의 대한 진실에 대한 추적이, 이제야 겨우 서막을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그들이 걸어온 모든 길이 갈림길로 인해 사라지기 전에 안정적인 길을 찾아야 할 때였다.
그러나, 그 위치에서 천천히 그들을 감싸며 퍼지는 어둠은 아직도 생각보다 제법 길게 이어져 이상하게 나무라지 못할 시간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그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머뭇거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들 앞에 무엇이 벽을 드리우고 있는지 아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실루엣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향해 뭔가를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그들 가까이서 울려 퍼져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이미 시간이 촉박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벗어나 은밀하게 이어지는 새로운 갈래를 제시할지 모르는 게 누군지 몰라도 그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는 막막한 안갯속에 실체가 보일 때까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향해 가는 끝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그들은 그 자신들의 그림자를 발견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그들이 용기 내어 걸어가야 할 미래의 이야기는 여전히 팔을 벌리고 있었으며, 어서 길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어떤 발걸음이 그들의 완벽함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