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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었다
제15화

15화: 심판의 서막

“부디… 잊어버린 물건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가씨.”

김태준 비서의 목소리는 최고급 벨벳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서늘한 칼날은 내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닫힌 차 문은 세상과 나를 완벽하게 단절시켰고, 방음 처리가 잘 된 세단의 내부는 숨 막히는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옭아맸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없는 행동을 하리라는 것을.

“그럼요. 제가 뭘 잊었겠어요.”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블라우스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어지러운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저택의 높은 담벼락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나는 거대한 요새를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자동차는 부드러운 엔진음만을 남긴 채 서울의 심장부를 향해 미끄러져 나아갔다. 김 비서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수만 가지의 의심과 경고를 담은 채,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손바닥 안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열쇠의 감촉을 느끼려 애썼다. 진짜 열쇠는 지금 내 방, 낡은 책갈피 속에서 차갑게 숨 쉬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을 피해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 준서는… 약속을 지켜줄까. 불안감이 독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익숙하지만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동네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낡은 빌라들과 작은 가게들, 그리고 언덕 끝에 자리한 ‘햇살 보육원’의 낡은 간판. 자동차가 보육원 정문 앞에 멈춰 서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것이 시작될 무대였다.

김 비서가 먼저 차에서 내려 내 문을 열었다. 그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처럼 정중했다. 차에서 내리자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소독약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25년간 내 세상의 전부였던 냄새였다.

“하린아!”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원장 선생님이 나를 향해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 이 저택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였다.

“원장님… 보고 싶었어요.”

“아이고, 이 녀석. 재벌가 아가씨가 다 됐는데도 여전히 애기 같구나. 어서 들어오렴. 아이들이 널 얼마나 기다렸다고.”

원장님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둘러쌌다. 그 순수한 시선 앞에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한 죄책감이 목구멍을 찔렀다. 김 비서는 내 뒤에서 흐뭇한 미소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자비로운 주인이 자신의 애완동물이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트렁크에서 내린 선물 상자들이 강당으로 옮겨지고, 그룹의 홍보팀 직원 몇 명이 카메라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이 김 비서의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재롱 잔치가 시작되고, 내가 단상에 올라가 짧은 인사를 하는 순서가 되었을 때였다.

쾅!

강당의 뒷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듯 위태로운 눈빛을 한 준서가 서 있었다. 그의 등장은 이 평화로운 연극 무대를 산산조각 내는 불청객의 난입이었다.

“여기서 다들 뭐 하는 쇼들이야!”

준서의 고함에 강당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홍보팀 직원들이 당황하며 카메라를 내렸고,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내 등 뒤로 숨었다. 김 비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준서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닥쳐! 당신 같은 개가 낄 자리가 아니야!”

준서는 김 비서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내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강하린! 너, 여기서 행복한 척 연기하니까 재밌어? 네가 버려졌던 이 시궁창에 금의환향이라도 한 기분인가? 이 모든 게 위선이고 거짓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준서 오빠, 왜 이래! 놔!”

“놓으라고? 네가 나타나서 모든 게 엉망이 됐어! 어머니의 평화로운 안식마저 네가 다 망쳐버렸다고! 차라리 그때 그냥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그의 폭언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 어린 고통과 분노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내 심장까지 아려왔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원장 선생님은 사색이 되어 우리 사이를 말리려 애썼다. 상황은 완벽하게 김 비서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온전히 준서에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아…!”

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준서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자, 원장 선생님이 기겁을 하며 나를 부축했다.

“하린아! 왜 그러니, 아가! 안색이 파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잠깐… 바람 좀….”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연기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 연기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김 비서였다. 그의 시선이 순간 나에게로 향했지만, 그보다 먼저 준서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꼴좋다! 넌 평생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게 될 거야!”

김 비서는 이 추문을 어떻게든 수습해야만 했다. 그는 홍보팀 직원에게 눈짓을 보내 카메라를 치우게 하고, 준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련님, 그만하시죠. 회장님께서 아시면….”

“아버지가 무섭냐? 아니, 넌 아버지가 아니라 네 완벽한 계획에 흠집이 가는 게 두려운 거겠지!”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틈을 타, 원장님이 내 등을 떠밀었다.

“얘,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 넌 어서 내 사무실에 가서 좀 누워있어.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야. 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강당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꺾어 뒷문으로 향하는 짧은 순간, 등 뒤에서 나를 향한 김 비서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문을 잠갔다. 낡은 책상 위에 놓인 원장님의 외투와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외투를 걸치고 스카프로 머리와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리고 지갑에서 비상금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작은 메모를 남겼다. ‘원장님, 죄송해요. 금방 돌아올게요.’

나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보육원 뒤편은 낮은 담벼락으로 이어져 있었고, 나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필사적으로 담을 넘었다. 성공이었다. 나는 마침내 악마의 감시에서 벗어난 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을 외쳤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준서는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김 비서는 언제쯤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챌까. 모든 것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초조함을 더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나는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며 지하 2층으로 향했다. 거대한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음과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익명성 속에서 나는 잠시 안도감을 느꼈다. C구역. 나는 표지판을 따라 미로 같은 통로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낡은 회색 사물함들 사이에서 ‘C-38’이라는 숫자를 발견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침을 한번 삼키고, 주머니 속에서 아침에 몰래 챙겨 나온 열쇠를 꺼냈다. 책과 함께 가져올 수는 없었기에, 열쇠만 간신히 빼내온 참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멍에 꽂고 돌렸다. 철컥, 하고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25년 동안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소리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천히 사물함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안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들었다. 묵직했다. 단순한 서류 뭉치가 아니었다.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구석진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상자의 낡은 걸쇠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갈색으로 변색된 낡은 카세트테이프 하나와, 손바닥만 한 벨벳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먼저 벨벳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아주 낡고 변색된 은제 로켓 목걸이였다. 어머니의 유품 사진 속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목걸이였다.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로켓을 열었다. 닳아빠진 경첩이 삐걱, 소리를 냈다.

로켓의 한쪽에는 갓난아기의 흑백 사진이 들어있었다. 나일까? 하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내가 보았던 내 아기 때 사진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사진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아주 작게 접힌 누런 종잇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폈다. 그 안에는 오래되어 번진 잉크로 쓴 단 세 글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머릿속의 모든 퍼즐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윤지훈’

서영그룹 윤 회장의… 죽은 아들. 그 이름이 왜 어머니의 로켓 안에서 나오는 거지?

📚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었다
1화   1화: 갑작스러운 진실 2화   낯선 문턱 앞에서 3화   3화: 낯선 가족의 온기와 그림자 4화   오라버니의 다정함, 동생의 비밀 5화   차가운 그림자, 따뜻한 온기,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 6화   비밀의 문턱을 넘어서 7화   균열과 마주서다 8화   균열 너머, 드리운 그림자 9화   미궁의 열쇠 10화   숨 막히는 진실의 심연 11화   11화: 판도라의 상자 12화   악마의 초상 13화   13화: 심연의 속삭임 14화   14화: 포식자의 눈 15화   15화: 심판의 서막 16화   16화: 이름 없는 아기 17화   17화: 핏줄의 균열 18화   18화: 악마의 자장가 19화   제19화: 거짓된 요람 20화   제20화: 거짓된 요람 21화   제21화: 부서진 요람 22화   제22화: 잿더미 위에서 피는 꽃 23화   제23화: 악마의 체스판 24화   제24화: 가장 눈부신 파멸 25화   제25화: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