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에서 준서의 뒷모습을 본 후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마’라는 단어와 ‘지키지 못했어’라는 후회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동안 나를 향했던 날 선 경계심 뒤에 이토록 깊은 슬픔과 죄책감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의 차가운 눈빛 너머에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자, 준서의 모든 행동이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나는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웠는데, 이 집의 비밀은 마치 거대한 미궁처럼 나를 더욱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사진 뒤에 쓰인 ‘미안하다’는 글귀, 아버지가 말한 ‘불미스러운 일’, 그리고 준서의 알 수 없는 행동들까지. 모든 조각이 흩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집의 그림자 속에서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 속에서 진정으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픔과 비밀을 이해해야만 했다. 특히 준서와의 관계는 이 집의 과거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았다. 그의 슬픔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가 지키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물어봐야 했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진실을 향한 갈망이 그보다 더 컸다.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내 마음속은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 굳게 다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 내 눈은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어제 한서 오빠가 전해준 따뜻함은 잠시 위로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 위로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나는 더 큰 그림을 이해해야만 했다.
아침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고, 한서 오빠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준서는 평소처럼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는 그 차가움이 슬픔의 가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하린아, 오늘은 뭘 할 생각이니? 혹시 답답하면 태준 비서에게 말해서 외출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니?"
"아니요, 아버지. 괜찮아요. 오늘은… 준서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내 말에 아버지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한서 오빠도 컵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준서는 순간 포크를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그의 미묘한 반응에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식사를 마친 후, 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준서야,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요? 저 지금 바쁩니다."
그의 거부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지금 꼭 해야 할 이야기야. 너와 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라는 단어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저를 따라오시죠."
준서는 나를 데리고 저택 뒤편에 있는 작은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늘 어둑했고, 고요함 속에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준서는 문을 닫고 나와 마주 보고 섰다. 그의 팔짱을 낀 자세는 여전히 방어적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꺼냈다.
"네가 왜 나를 경계하는지 알아. 아니, 어쩌면… 조금은 알 것 같아.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알아."
내 말에 준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뭘 안다는 거죠? 갑자기 나타난 당신이 우리 어머니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 사진을 봤어. 숨겨진 방에서. 그리고… 그 뒤에 쓰여 있던 글귀도."
준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린 듯했지만, 이내 날카로운 분노로 바뀌었다.
"거길 왜 들어갔습니까! 제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당신이 뭔데 함부로 남의 추억을 더럽힙니까?"
그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위협적인 기세에 주춤했지만, 나는 애써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사진은 내 어머니의 사진이기도 해. 그리고 그 아이는… 나야. 내가 왜 내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안 되는 건데? 왜 어머니는 내게 미안하다고 쓰셨는지, 그리고 왜 25년 동안이나 나는 버려져야 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야."
내 목소리에도 떨림이 섞여 있었지만,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 미묘한 변화가 스쳐 지나갔다. 분노 너머에 깊은 슬픔이 비쳤다.
"당신이 뭘 안다고!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때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요! 어머니가…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준서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의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말에서 중요한 단서를 들었다. 어머니가 '힘드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건데? 아버지는 그저 ‘불미스러운 일’이라고만 말씀하셨어. 너는 그날 밤 온실에서… 어머니께 미안하다고 했잖아. 뭘 지키지 못했다는 건데?"
내가 온실 이야기를 꺼내자 준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내가 자신의 비밀을 엿들었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하는 듯했다.
"당신… 날 미행이라도 한 겁니까? 어디까지 아는 겁니까?"
"미행한 게 아니야! 그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가다가… 우연히 본 거야. 네가 너무 슬퍼 보여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했다. 준서는 잠시 말을 잃은 듯 나를 노려봤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분노, 그리고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우리 가족에게 재앙이에요. 당신이 나타나고 나서… 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고!"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재앙이라니. 내가 이 집에 나타난 것이 그에게 그렇게 큰 고통이라는 말인가.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재앙이라고? 그럼 너는 내가 사라지길 바라는 거야?"
"……"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그토록 바라왔던 가족에게서 ‘재앙’이라는 말을 듣다니.
그때,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간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한서 오빠였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소란이야? 준서, 하린이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야."
한서 오빠의 등장에 준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다시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형은 빠져. 이건 형이 알 필요 없는 일이야."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라고? 하린이가 우리 가족인데, 내가 모를 일이 어디 있어?"
한서 오빠는 준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이, 강렬한 형제애와 보호 본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서 오빠가 우리 사이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의 방에서 나갈 때 문 너머를 불안하게 바라봤던 것을 떠올렸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어머니가…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하린 씨가 왜 사라졌었는지… 형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준서의 폭탄선언에 나는 물론, 한서 오빠까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한서 오빠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니. 대체 무슨 진실을 말하는 걸까. 그의 말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숨겨진 어떤 더 깊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준서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서 오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서는 비웃듯이 말했다.
"웃기지 않아요, 형?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지켜내려고 했던 것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 진실을 하린 씨는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형도, 아버지도… 더 이상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걸."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니. 이 집에 숨겨진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진실이 나를 다시 고아로 만들 것이라는 준서의 경고는 무슨 의미일까. 한서 오빠는 입술을 꽉 깨물고 준서를 노려봤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이 집의 비밀이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훨씬 더 어둡고 복잡한 무언가와 얽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나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드리워진 차가운 그림자. 그 그림자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알았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거대한 미스터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내가 과연 이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놓인 길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찾던 가족의 온기조차 위협할 잔혹한 진실의 문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