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췄다.
혹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준서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휴대폰이 바닥에 부딪히는 그 둔탁한 파열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카펫 위로 떨어졌음에도, 그 소리는 내 고막을 찢고 들어와 뇌수를 뒤흔드는 천둥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은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셔 밀랍처럼 변해버린 그의 얼굴 위로, 스크린의 차가운 불빛이 끔찍한 진실의 낙인을 찍고 있었다.
이수빈.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던, 준서의 곁에서 단정하게 서 있던 그 여자. 그녀의 블라우스 깃에 달려 있던 작은 나비 브로치. 내 언니, 강서아의 강보에 새겨져 있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의 표식.
“아니야.”
준서가 마른 목을 긁어내듯,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은 소리를 냈다.
“닮은 것뿐이야. 세상에 나비 브로치가 저거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우연일 거야. 이건 그냥… 빌어먹을 우연이라고.”
그의 목소리는 필사적인 부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끝은 절망으로 너덜너덜하게 해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단단했던 세계가 발밑에서부터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내 안의 모든 감정이 얼어붙어 버렸다. 충격, 분노, 슬픔, 그리고 아주 희미한… 안도감. 내 쌍둥이 언니가 살아있다는. 하지만 그 안도감은 곧이어 밀려오는 거대한 공포의 파도에 잠식당했다. 그녀는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김태준과 한서가 찾고 있는 ‘진짜’ 핏줄.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맹수의 아가리 바로 앞에서 웃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져.”
내 목소리는 낯설 만큼 차갑고 건조했다. 감정이 거세된 기계음 같았다.
“어머니의 주치의 가문에서만 내려오는 표식이라며. 그런 걸 아무나 하고 다닐 리가 없어. 게다가 이름… 이수빈. 어머니가 남긴 이름이 ‘서아’였지. 성을 숨기고, 이름만 살짝 비틀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야.”
나는 무너져가는 그를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차가운 이성으로 현실을 조각조각 해부했다. 지금 무너지면 끝장이었다. 김태준이 깔아놓은 이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감정에 휘둘리는 말은 가장 먼저 잡아먹히기 마련이니까.
준서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그의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를 향해 가시를 세우고, 세상을 향해 갑옷을 둘렀던 남자였다. 그런 그의 갑옷이, 작은 나비 한 마리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럼… 뭐야. 그럼 수빈이가… 그 여자가 윤지훈의 딸이고, 그래서 어머니가….”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의 어머니가 자신의 진짜 딸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딸인 나를 버렸다는 잔혹한 진실을 제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이 심장에 박힌 유리 조각처럼 아파왔지만,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내 상처를 돌볼 때가 아니었다.
“확인해야 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서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햇살 보육원으로 가야 해. 박 원장님이라면 모든 걸 알고 계실 거야. 어머니가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니까.”
내 말에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만나서 뭘 어쩔 건데! 당신이 윤지훈의 딸을 지키기 위해 버려진 쌍둥이 동생이라고 말이라도 할 셈이야? 그 여자가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인생까지 망가뜨릴 셈이냐고!”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한서 오빠랑 김 비서가 먼저 그 아이를 찾아내게 내버려 두라고? 그들이 왜 그토록 윤지훈의 핏줄을 찾으려 하는지 아직 몰라. 하지만 절대 좋은 의도는 아닐 거라는 건 확실해! 이수빈 씨가 위험해.”
내 외침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고통과 혼란이 뒤엉켰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동아줄이자 동시에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마침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작은 결의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자.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
서울 시내에 위치한 서영 의료원 로비는 차가운 대리석과 은은한 조명, 그리고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병원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기부자 명단이 새겨진 벽 뒤, 인적이 드문 구석에 몸을 숨겼다. 준서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복도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30분 뒤에 소아과 병동 회진이야. 그때 복도를 지나갈 거야.”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날뛰었다. 내 생의 절반. 내 얼굴을 한 또 다른 나를 마주하기 직전이었다. 어떤 기분일까. 거울을 보는 것 같을까, 아니면 완전히 낯선 타인을 보는 기분일까. 수많은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하얀 가운을 입은 무리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수빈이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 말을 할 때 작게 움직이는 입술의 모양까지. 그녀는 나와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내가 가져보지 못한 평온함과 따스한 햇살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나의 날카로움과는 다른, 사랑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부드러움이었다.
그녀가 동료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준서는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가슴, 하얀 가운의 깃 위에서 작은 나비 브로치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본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바로 그 브로치였다.
준서의 어깨가 절망적으로 축 처졌다.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버린 얼굴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벽 뒤에서 한 걸음 나섰다. 준서가 기겁하며 내 팔을 붙잡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친 채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내 머릿속은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끝인 그 얼굴을, 내 눈으로 똑똑히.
이수빈과 나의 거리가 불과 몇 미터 앞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그녀가 동료와 웃으며 이야기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시간이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에는 순수한 놀라움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한 사람처럼,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변의 동료 의사들도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수빈 선생님, 쌍둥이 동생 있으셨어요? 왜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
한 간호사의 말에, 이수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외동인데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어떤 경계심도, 악의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낯선 존재에 대한 순수한 의문과 혼란만이 가득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지 전혀 모르는, 그저 선량한 의사일 뿐이라는 것을.
그녀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준서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감쌌다. 그는 이수빈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수빈 선생님. 제 동생이 선생님의 오랜 팬이라서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동생’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그는 나를 이끌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이수빈과 동료들의 의아한 시선이 따갑게 박혔다. 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차 안의 공기는 납처럼 무거웠다. 준서는 핸들을 부서져라 쥔 채, 아무 목적지도 없이 도로를 달렸다. 그의 턱선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이제 어쩔 거지?”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원장님을 만나러 가야 해. 그분만이 모든 걸 설명해 주실 수 있어. 이수빈 씨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준서는 대답 대신 거칠게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이 맞아. 그 여자, 아무것도 몰라.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갈라졌다. 그는 평생을 지켜왔던 세계가 거짓이었고, 자신이 미워했던 이복동생이 사실은 진짜 여동생이었으며, 자신이 아끼고 신뢰했던 동료가 모든 비극의 열쇠를 쥔 존재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도시의 풍경이 흐릿하게 번져갔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 내 존재, 심지어 내가 믿었던 사람들까지도. 유일한 진실은, 이 모든 것을 설계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비웃으며 다음 수를 두고 있겠지.
“가자. 보육원으로.”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준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있는 곳, 혹은 또 다른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을 향해. 자동차가 익숙한 동네로 접어들고, ‘햇살 보육원’의 낡은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위이잉-.
내 외투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심장이 불길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김태준 비서의 장난이 또 시작된 것일까. 망설이는 나를 보고 준서가 턱짓했다.
“받아. 피하면 지는 거야.”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몇 초간 이어졌다. 내가 막 전화를 끊으려던 바로 그 순간,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음성 파일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만 생각했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수십 년간 나를 키워준 박 원장님의 목소리였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차 안의 공기가 진공상태가 된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원장님이… 김태준 비서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믿었다던 그 사람이, 처음부터 적의 편이었다.
음성은 계속되었다. 원장님의 목소리 뒤로, 차갑고 무감정한 김태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태준 비서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음성 파일이 끝나고, 전화는 소리 없이 끊겼다. 자동차는 보육원 정문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박 원장님이 평소와 똑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뒤로, 거대한 거미줄의 입구가 어둡고 축축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