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훈.
뇌가 그 세 글자를 온전히 인식하기를 거부했다. 잿빛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하 비상계단의 탁한 공기 속에서, 나는 손에 든 작은 종잇조각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오래되어 희미해진 잉크 자국은 분명 ‘윤지훈’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있었다. 서영그룹의 후계자. 25년 전,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남자. 내 어머니의 로켓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이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왜? 어째서 어머니의 유품에서 이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함께 들어있던 갓난아기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눈, 오밀조밀한 입술. 내가 보아왔던 내 어린 시절 사진과는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윤지훈의 아이인가? 아니면… 설마….
끔찍한 상상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남자의 이름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려 했지만,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불안의 경종을 울려댔다. 어머니는 이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그래서 아버지와 서영그룹 사이에서 고통받았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누구의 딸이지? ‘재벌의 숨겨진 딸’이라는 내 존재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감각에 숨이 막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상자 안에 남겨진 마지막 물건,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안에 모든 해답이, 혹은 더 끔찍한 질문이 담겨있으리라는 것을.
문제는 이것을 들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20여 년도 더 된 유물을 재생할 기계가 지금 내게 있을 리 만무했다.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준 비서가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이곳을 떠야만 했다.
나는 로켓과 테이프를 다시 상자에 넣고 품에 단단히 안았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뛰쳐나가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위이잉-. 위이잉-.
외투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발신자는 ‘준서 오빠’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가 이 타이밍에 전화할 리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지금 당장 돌아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몹시 다급했다. 그의 목소리 뒤로 희미하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나 아직….”
“김 비서가 눈치챘어. 네가 아픈 게 연기였다는 거, 전부 다! 지금 사람 풀어서 너 찾고 있을지도 몰라. 젠장, 내가 시간을 더 끌 수가 없었어! 그 자식, 괴물이야!”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김태준이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나는 제대로 걸려들었다.
“어떡해… 나 지금 서울역인데….”
“멍청하게 거기 서 있지 말고, 셔틀버스 타는 곳 뒤편, 7번 주차 구역으로 와! 5분 주지. 그 안에 못 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툭.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잠시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부딪치며, 차가운 욕설을 들어가며, 나는 오직 7번 주차 구역이라는 이정표만을 좇아 뛰었다. 품에 안은 나무 상자가 갈비뼈를 찧어댔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끼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내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타!”
차에 올라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자동차는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준서는 핸들을 부서져라 쥔 채, 핏발 선 눈으로 백미러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미쳤어? 한 시간이면 된다며! 거의 두 시간이 지났어! 그 괴물 같은 자식 앞에서 두 시간이나 버티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가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찾았어…?”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품에 안고 있던 나무 상자를 들어 보였다. 그는 흘깃, 상자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 목숨 걸고 가져올 만한 가치는 있는 물건이야?”
“아직… 몰라.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야.”
내 대답에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과 거친 엔진음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쫓기는 도망자였다. 보이지 않는 포식자의 눈을 피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소굴로 전속력을 다해 질주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그 지옥의 심장부, 저택 안이었으니까.
“일단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간다. 내가 김 비서에게는 당신을 겨우 찾아냈다고 둘러댈 테니, 당신은 몸이 안 좋아서 무작정 쉬러 나왔다고 해. 최대한 멍청하고 생각 없어 보이게 행동하라고. 알겠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까칠했지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일말의 보호 본능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미 공범이었다. 내가 열어젖힌 지옥의 문 안으로, 그 역시 발을 들인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 근처의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운 준서는, 나를 먼저 내리게 하고는 차를 돌려 떠났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부러 기운 없는 걸음으로 보육원 정문을 향해 걸었다.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연극이 남았다.
보육원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세단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김태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나와 그,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분노도, 안도도 아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무감각한 시선. 그 시선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가씨.”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부드럽고 정중했다.
“많이 편찮으셨던 모양입니다. 모두가 아가씨를 걱정했습니다.”
나는 그의 계산된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품에 안은 나무 상자를 등 뒤로 감추며, 준서가 시킨 대로 어설프게 변명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냥 무작정 걷다 보니… 죄송해요, 걱정 끼쳐서.”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내 영혼을 발가벗기는 듯 섬뜩했다. 그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구둣발이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사형수의 발걸음처럼 들렸다. 그가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 등 뒤, 내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는 나무 상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상자는…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군요.”
“…….”
“오래된 물건은… 특유의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먼지와… 잊힌 시간의 냄새 같은 것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잿빛 눈동자가 내 모든 것을 해부하듯 파고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조소를 그리듯 휘어졌다.
“특히…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녹음된 것이라면 더더욱 소중하시겠지요.”
온몸의 피가 역류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의문이 아니었다. 명백한 확신이었다. 그는 내가 서울역에 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가져왔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박철민 형사가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것일까? 아니면 내 주변에,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또 다른 눈이 존재하는 것일까?
김태준 비서는 내 얼어붙은 얼굴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더니, 이내 완벽한 비서의 얼굴로 돌아와 차 문을 열었다.
“자, 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시지요, 아가씨.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인형처럼 그의 말에 따라 차에 올라탔다. 손에 들린 나무 상자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을 향한 열쇠가 아니었다. 내 목을 겨누는 차가운 칼날이자, 이미 작동하기 시작한 시한폭탄이었다. 김태준 비서는 내 손에 쥐어진 폭탄의 뇌관을, 처음부터 자신의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택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현관문 앞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아버지였다. 그는 평소의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린아! 괜찮으냐! 태준이에게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그가 보여주는 부성애는 너무나도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아버지. 혹시… ‘윤지훈’이라는 이름… 아세요?”
그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의 손이 내 어깨 위에서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의 동공이 공포와 충격으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그리고 그 이름에 얽힌 모든 비밀을.
그 순간, 우리 뒤에 서 있던 김태준 비서의 입가에 아주 옅고도 기이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한, 잔혹한 연출가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