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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7화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었다
제17화

17화: 핏줄의 균열

아버지의 손아귀 힘이 괴물처럼 강해졌다. 내 어깨뼈가 그의 손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얼굴은 방금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입술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평생을 지켜왔을 군주의 가면이 ‘윤지훈’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 산산조각 나버린 순간이었다.

“네가…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단순한 충격을 넘어선, 원초적인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25년간 단단히 봉인해두었던 지옥의 문이 내 손에 의해 열렸다는 사실을 직시한 자의 절망. 그의 반응은 내가 찾아낸 것이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이 집안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핵폭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살얼음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언제나처럼 김태준 비서였다.

“회장님. 아가씨께서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우선 방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평온했다. 마치 제 아비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아들을 타이르는 집사처럼, 그의 말투는 아버지를 향한 은밀한 통제와 경멸을 담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버지를 향해 나지막이 덧붙였다.

“오래된 망령은… 산 사람을 해치는 법입니다.”

그 말에 아버지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내 어깨를 놓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그리고 내 등 뒤의 나무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입술만 달싹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망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과거로부터, 그리고 그 과거의 증인이 되어 돌아온 나로부터.

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사라지자, 현관 앞에는 나와 김태준 비서, 단둘만이 남았다. 싸늘한 밤공기가 맹수처럼 목덜미를 할퀴었다. 그의 잿빛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나무 상자에 못 박혔다.

“보육원에서 가지고 나온 추억의 물건이신가 봅니다. 아가씨께서는 물건을 꽤나 소중히 다루시는 편인 것 같군요.”

그의 말은 칭찬이었지만, 그 속내는 내 모든 것을 비웃고 있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되는 자의 손에 들린 진실의 조각’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독침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부디… 그 상자가 아가씨의 관이 되는 일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사신처럼 음산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들린 나무 상자는 더 이상 어머니의 유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태준이 내 손에 쥐여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폭탄을 들고, 기꺼이 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왔다.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자마자, 나는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 후들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날뛰었다. 나무 상자를 끌어안았다. 이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나를 이 지옥으로 이끈 이유,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카세트테이프. 이것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방대한 저택 어디에도 이 낡은 유물을 재생할 기계는 없을 터였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김 비서의 눈을 피해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거대한 미로 속에 갇힌 채, 출구를 눈앞에 두고도 열쇠구멍이 맞지 않는 열쇠를 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벌컥!

잠가두었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문 앞에는 잔뜩 흥분한 얼굴의 준서가 서 있었다. 그는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과, 내 앞의 나무 상자를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대체 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돌아오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으셔! 김 비서 그 자식 얼굴은 얼음장 같고!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함께 명백한 공포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나무 상자에서 은제 로켓을 꺼내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접혀 있던 종잇조각을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이 이름을 말했어.”

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종이를 들여다봤다. 그 위에 적힌 세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보육원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김 비서의 감시를 따돌렸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과 경악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는 마치 전염병이라도 만진 것처럼 종이를 떨어뜨렸다.

“너… 미쳤어? 이 이름을… 어디서….”

“어머니 로켓 안에 있었어. 이 아기 사진이랑 같이.”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경멸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그 이름은 이 집안의 금기어,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알아낸 게 고작 이거야? 이딴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그 난리를 쳤던 거냐고!”

“이게 다가 아니야.”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진짜는 여기 있어. 이걸 들어야 해. 하지만… 들을 방법이 없어.”

준서는 테이프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진실의 목전에서 차마 등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잠겨 있었다.

“……방법이 딱 하나 있기는 해.”

준서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의 동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굳게 닫힌 문 앞이었다. 육중한 월넛 문에는 정교한 장미 덩굴 조각이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두꺼운 먼지 더미에 뒤덮여 그 빛을 잃고 있었다. 문고리에는 녹까지 슬어 있었다. 이곳은 저택 안의 또 다른 무덤이었다.

“어머니 서재야.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폐쇄했어. 그 후로 아무도 들어온 적 없어.”

그가 품에서 꺼낸 낡은 열쇠로 자물쇠를 돌리자, 삐걱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25년의 시간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훅, 하고 묵은 종이 냄새와 말라비틀어진 꽃 향기, 그리고 시간의 먼지가 뒤섞인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서재 안은 거대한 거미줄에 휘감긴 채 시간이 멈춰 있었다. 벨벳 커튼은 빛이 바랬고,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과 펜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치 방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어머니는… 옛날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분이셨어. 아마 여기라면 있을 거야.”

우리는 유령처럼 발소리를 죽인 채 서재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낡은 책장을 뒤지고, 서랍을 열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을 때쯤, 준서가 책장 뒤편에 숨겨진 작은 벽장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취미였을 법한 물건들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낡은 카메라, 빛바랜 앨범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우리가 그토록 찾던 물건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구식 카세트 플레이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도, 내 눈에도 똑같은 긴장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준서가 플레이어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프를 꺼내 조심스럽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 소리가 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준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치직-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기계가 잠에서 깨어나듯, 둔탁한 소음과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우리의 타들어 가는 신경을 긁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이즈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을 멈췄다. 너무나도 젊고, 맑지만, 그 안에 깊은 슬픔과 절박함이 깃든 목소리. 어머니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 뒤편으로는 희미한 바람 소리와 빗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준서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벌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의 핏줄’. 윤지훈의 아이가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로켓 속의 아기는…. 그리고 나는….

내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충격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오빠? 한서 오빠? 아니면 준서? 혼란이 극에 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익-

테이프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멈춰버렸다. 마치 가장 중요한 부분만 교묘하게 잘려나간 것처럼.

그리고 그때였다.

굳게 닫힌 서재 문밖에서, 묵직하고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다가와 우리 방문 바로 앞에서 멈춰서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 나는 재벌의 숨겨진 딸이었다
1화   1화: 갑작스러운 진실 2화   낯선 문턱 앞에서 3화   3화: 낯선 가족의 온기와 그림자 4화   오라버니의 다정함, 동생의 비밀 5화   차가운 그림자, 따뜻한 온기,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 6화   비밀의 문턱을 넘어서 7화   균열과 마주서다 8화   균열 너머, 드리운 그림자 9화   미궁의 열쇠 10화   숨 막히는 진실의 심연 11화   11화: 판도라의 상자 12화   악마의 초상 13화   13화: 심연의 속삭임 14화   14화: 포식자의 눈 15화   15화: 심판의 서막 16화   16화: 이름 없는 아기 17화   17화: 핏줄의 균열 18화   18화: 악마의 자장가 19화   제19화: 거짓된 요람 20화   제20화: 거짓된 요람 21화   제21화: 부서진 요람 22화   제22화: 잿더미 위에서 피는 꽃 23화   제23화: 악마의 체스판 24화   제24화: 가장 눈부신 파멸 25화   제25화: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