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거대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내가 살던 원룸의 곰팡이 냄새 가득한 천장이 아니라,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하얀 천장. 이곳의 모든 것이 낯설었고, 그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특히나 신경 쓰이는 건 마지막에 본 준서의 뒷모습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들고 급히 걸어가던 그의 모습. 작은 서류 봉투 같았던 그 물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숨기듯 움직였던 걸까. 차가운 그의 눈빛과 그 행동이 겹쳐지면서, 이 집에 숨겨진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뒤척이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정원에는 달빛만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창가에 서서 밤의 정원을 바라봤다. 25년간 꿈꿔왔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왔지만,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은 더욱 공허하고 불안했다. 외로움이 익숙했던 나에게, 갑작스러운 온기는 환영받지 못하는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연 이곳이 내가 찾던 ‘집’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낯선 감옥일까.
다음 날 아침, 낯선 환경에 익숙지 않은 탓에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방 안은 어둠 속에 고요했고,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잊을 뻔했다. 내가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 되었고, 이 호화로운 방이 이제 내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했다. 어색하게 몸을 일으켜 커다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며칠 사이 겪은 일들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거울 속 흐릿한 눈빛이 말해주는 듯했다.
아침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어제처럼 긴장한 채 문을 열자, 이미 아버지와 한서, 준서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어색한 풍경이었다. 내가 앉자마자 시선을 느꼈다. 준서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무심하게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저릿했다.
아버지가 먼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린아, 잠은 잘 잤니? 혹시 불편한 건 없었고?" 그는 늘 내가 편한지 걱정했다. 그 따뜻함에 가슴 한구석이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네, 아버지 덕분에… 잘 잤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았지만, 노력했다. 그러자 한서가 내 접시에 샐러드를 덜어주며 말했다.
"아직은 낯설겠지만, 천천히 적응하면 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그 다정함이 내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고마워요, 오빠"라고 말했다.
그때, 묵묵히 식사만 하던 준서가 갑자기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할 일이 있어서요." 그는 아버지와 한서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더니,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이닝 룸을 나섰다. 그의 태도에 식탁 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준서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한서는 한숨을 쉬었다.
"준서가… 좀 예민한 편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하린아." 한서가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온전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젯밤 그의 수상한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예민함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준서가 왜 나를 그렇게 경계하는지, 그리고 어젯밤 그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는 무엇이었는지… 궁금증은 점점 커져갔다. 문득 한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천히 적응하면 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렇다면 이 집을 둘러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 거대한 저택 어딘가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복도는 여전히 길고 고요했다. 낮인데도 어딘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저택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앤티크 가구들, 이름 모를 화가들의 그림, 거대한 서재, 그리고 사용되지 않는 듯한 응접실까지. 모든 공간이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문득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낡고, 어쩐지 숨겨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은 어둡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창문이 없어 햇빛조차 들지 않는 작은 방이었다. 오래된 창고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버려진 공간 같기도 했다.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상자들, 덮개로 덮인 가구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액자 몇 개.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 액자들로 향했다. 액자 속 사진들은 빛이 바래 있었지만, 그중 하나의 사진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사진 속에는 젊은 여자와 어린 아이가 함께 웃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어렴풋이 김태준 비서가 보여줬던 내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은… 놀랍게도 나를 닮아 있었다. 아니, 나보다 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여자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사진 뒤편에 흐릿하게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린아, 엄마는… 미안하다.’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엄마? 미안하다니…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나는 사진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찼다. 내가 찾고 싶었던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더 큰 미스터리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해?" 나는 화들짝 놀라 사진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 준서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싸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그는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눈빛에서 경계심을 넘어선, 날카로운 적대감이 읽혔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방을 둘러보다가… 여기가 열려 있어서…" 변명처럼 들리는 내 말에 준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눈은 마치 내가 해서는 안 될 비밀을 건드린 것처럼 차갑게 빛났다.
"누가 여기 들어오라고 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사진 뒤편에 쓰인 글씨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방, 그리고 이 사진이 준서가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나를 꿰뚫어 볼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함부로 남의 물건을 건드리지 마. 그리고… 이곳은 다시는 오지 마." 그의 말은 경고였다. 분명한 협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절박해 보였지만, 동시에 나를 향한 깊은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집에 온 순간부터 느껴왔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재벌의 딸이 아니라, 이 집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낯선 세상은, 단순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그들의 감춰진 그림자를 건드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