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멈추고 고요가 내린다. 다락방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하루는 좌절감에 손톱을 깨문다. 할아버지가 남긴 악보 속 음계는 신비롭지만 불안했다. 그녀가 무심코 연주했던 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눈앞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락방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칼에 바람이 입을 맞추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뒤로 돌아누운 문 쪽을 향했다. 검은 실루엣, 은은한 빛을 받아 누군가의 눈동자가 고요히 반짝였다.
"준호, 네가 왜 여기...?"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에 닿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미묘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서. 하루, 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해 줘."
한숨을 쉬 듯, 하루는 악보를 들어올렸다. 준호의 눈에 책의 낯선 기보가 비쳤다. 그의 콧등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더니 그가 속삭였다.
"이것 때문이군. 할아버지의 음계들."
"그래. 잘못된 걸까? 다른 선택을 해야 했어?"
비밀을 감싸듯 악보를 품에 안았다. 준호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에는 심연의 깊은 우려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루,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곳이야. 그러나 그 흥미로운 것들이 때때로 우리를 삼키려고 하지."
그의 말은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강한 격정이 안전한 곳을 넘나든다. 그녀의 기억 한편에 숨어있던 할아버지의 경고가 불현듯 살아났다.
"이 음계는 현실을 바꾼다."
비가 그친 하늘 위에는 이른 해의 빛이 창백하게 돋아났다. 하루는 악보를 더 단단히 잡으며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겠지. 어떡해서든."
결의에 찬 목소리에 준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곧 무거운 고요를 깨고 개탓하듯 말했다.
"너만 할 수 있어, 하루. 하지만 네가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으로 끝일 수도 있어."
그가 손을 빼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안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새로운 이유로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준호, 나랑 같이 해줄 거지? 도와줄 수 있어?"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았다. 그 강렬한 접촉이 그녀의 의심을 견고하게 사라지게 했다.
"그럼. 어디라도 함께 갈게."
그 순간, 다락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질적으로 명랑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세희였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했지만, 그 속에는 가벼운 불안의 기운도 있었다.
"너희 둘, 준비가 됐어? 모험할 준비?",
세희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서둘러 일어섰다. 하루가 악보를 품속에 넣고 준호와 함께 다락방을 나설 때, 세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떠나자, 금지된 음계의 비밀을 찾아. 우리의 모험은 지금 시작이에요."
그들 셋은 한걸음 한걸음 씩, 세상이 열릴 순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한낱 게임이 아닌, 진짜 현실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행이 다락방을 빠져나가는 순간, 음계가 다시 방 안으로 퍼지자, 그것이 소리 없이 창문 너머 하늘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보이지 않는 무언의 경고가 곧 그들을 끊임없이 경로로 이끌 것이라는, 짐짓 알 수 없는 진동이 공기 중에 느껴졌다.
미지의 여행이 시작되려는 순간, 돌연 인적 드문 길목에서 나타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그들의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긴장감이 서늘하게 감돌았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투명하게 웃고 있는 낯선 남자의 얼굴이 뒤섞인 장난스런 눈빛을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이 남자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그들을 바라본다. 그는 손에 작은 현관종을 갖고 있었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이 바뀔 운명이 걸려 있는 듯했다.
"나는 너희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이제, 더 흥미로운 일이 시작될 거야."
그 순간 하루는 모질게 결심한다. 주어질 새로운 굴레에서 벗어날 의지를 가슴 깊이 새겼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출발한 셈이다. 하루의 손끝에서 멈추었던 금지된 음계는 세상의 문을 잠시 열어젖혔으니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다음엔 어떤 운명이 그녀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대답은 아득히도 계신 할아버지의 희미한 미소 속에 묻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확고한 신호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